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매디슨, 여우주연상 선두주자
러시아 재벌의 아들과 뉴욕 스트리퍼의 로맨스 영화 ‘아노라(Anora)’. 1990년대의 신데렐라 스토리로 당시 23세에 불과했던 무명의 줄리아 로버츠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프리티 우먼(Pretty Woman)’의 21세기 버전일까.
이런 예감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영화를 연출한 션 베이커 감독의 이전 작품들인 ‘스타렛’(2012)과 ‘탠저린’(2015),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등을 기억한다면 그가 ‘프리티 우먼’류의 신데렐라 영화와는 거리가 먼 감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베이커 감독은 주로 하위문화에 속하는 버림받은 인물들과 이민자, 성노동자 등을 주인공으로 미국인들의 속물적인 모습을 그려온 인디영화 감독이다.
제7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노라’ 역시도 어김없이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의 이야기이고 돈이 신분 구별의 수단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영화이다.
늘 전철이 지나가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허름한 집에 살고 있는 스트리퍼 아노라(마이키 매디슨), 고달픈 ‘육체 노동’에도 벌이가 시원치 않다. 그런 그녀에게 대전환의 기회가 찾아온다.
러시아 재벌 2세, 그러나 철부지인 이반(마크 에이델슈테인)이 스트립클럽에 놀러 온다. 그는 아노라에게 첫눈에 반한다. 이반과의 충동적인 사랑, 신분 상승을 꿈꾸는 아노라의 허황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아노라는 이반의 구혼을 받아들이고 곧바로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아노라의 꿈은 곧바로 깨져버린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결혼 사실을 알게 된 이반의 부모들이 하수인들에게 둘의 결혼을 무효로 하라고 지시한다. 겁에 질린 이반은 아노라를 홀로 버린 채 도망가 버리고 아노라는 궁지에 몰린다. 그녀가 결혼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법에 호소하는 일뿐이다.
미국의 사법제도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자본주의 사회의 법조차도 아노라의 편이 아닌 듯 보인다. 그녀는 이반을 찾아 다시 사랑을 쟁취할 수 있을까.
얼핏 동양계 혼혈로 보이는 아노라는 우즈베키스탄계 이민 가정 출신이다. F로 시작하는 천박한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성노동자 아노라가 진정 신데렐라이기를 바라는 관객의 마음은 순전히 마이키 매디슨의 힘이다. 실제로는 유대계인 매디슨의 연기에 관객은 쉽게 동화되고 그녀의 불행에 가슴 아파한다.
‘아노라’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지만 무명이었던 매디슨을 (90년대의 로버츠처럼) 영화계의 신데렐라로 만들었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오스카 여우주연상 선두주자로 급부상하는 행운을 안았다. ‘아노라’는 션 베이커 감독과 마이키 매디슨에게 최고의 해를 가져다준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김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