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말에 '번개가 많이 치면 풍년이 든다'고 했다. 과학적 지식이 일천하던 시절, 선조들이 오랜 시간 자연 현상에서 체득한 경험치였다.
하지만 이 말에는 꽤 고차원의 과학적 이치가 담겨 있다. 번개가 치면 공기 중 질소가 이온화돼 빗방울에 녹아든다. 빗물이 땅속에 들어가면 천연 질소비료 역할을 하고 그래서 농작물이 잘 자라게 되는 원리다.
이때 번개는 고체, 액체, 기체에 이어 물질의 네 번째 상태로 알려진 플라즈마(Plasma) 현상 중 하나다. 매우 높은 온도에서 기체 원자를 이루는 원자핵과 전자가 분리돼 이온화된 상태가 바로 플라즈마다.
번개와 농사의 관계만큼이나 플라즈마는 우리 일상이나 삶과 관련이 깊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플라즈마를 발생하고 다루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 세상을 바꾸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미래 에너지 개발이다. 핵융합 발전은 태양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수소 가스를 플라즈마로 변환한 뒤 수소의 원자핵이 융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에너지로 전력을 만드는 방식이다.
핵융합 반응이 활발히 일어나도록 1억도 이상 초고온 플라즈마를 장시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한국의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는 초고온 플라즈마의 장시간 운전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플라즈마가 바꾸는 세상은 이런 거대 과학기술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플라즈마는 수백도에서 수천도까지 온도가 다양하고 기체 종류나 발생 방식에 따라 다른 특성을 보인다.
이런 플라즈마의 특성을 살려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원하는 방식에 따라 사용할 수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 공정이다.
산화, 식각, 증착 등 주요 반도체 공정에서 플라즈마가 활용된다. 바이오 분야도 플라즈마 활동 반경이 확대되고 있다. 인체에 무해하면서도 살균력이 뛰어난 플라즈마 특성을 접목한 바이오 기술이 속속 개발 중이다.
특히 친환경 폐기물 처리는 플라즈마 특성과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다. 기존 폐기물 소각은 주로 불로 태우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유해 성분 가스가 발생하고, 이런 가스는 후단 시설을 통해 포집 후 굴뚝을 통해 배출된다.
하지만 플라즈마를 사용하면 화석연료 대신 전기로 열을 발생시켜 가스화하기 때문에 이산화탄소 등 유해 가스를 최소화할 수 있다. 동시에 그 과정에서 깨끗한 합성가스를 생산해 수소로 만들거나 발전에 활용 가능하다. 가스화되지 않는 폐기물 성분은 유리화해 순환 골재로 재사용할 수도 있다.
폐기물 가스화 기술이 등장한 것은 오래전이다. 하지만 온도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런 저온 가스화는 유해 성분의 함량이 높아 후단 설비에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플라즈마 가스화는 플라즈마 토치를 활용해 전기에너지를 열에너지로 변환해 사용하는 만큼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인 1400도 정도에서 가스화를 진행한다. 이 정도 고온 환경에서는 유해 물질이 거의 완전 분해돼 깨끗한 합성가스 생산이 가능하다.
플라즈마 가스화 기술이 폐기물 처리에 널리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안타깝다. 일부 도전적인 기업과 지자체가 도입을 시도했지만, 비즈니스 모델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우리는 선택의 시점에 와 있다. 당장의 편리함과 비용 절감을 선택할 것인지, 다소 부담이 들어도 깨끗한 환경을 선택할 것인지.
당장은 아니어도 후자를 선택하는 사회가 '진짜 선진국'이 아닐까. 그런 때가 곧 오리라 믿는다. 당연히 우리도 그때를 대비해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매진할 것이다.
최용섭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플라즈마기술연구소장 yschoi@kfe.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