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동행하며 나를 호강시켜 준 신발을 기억한다. 아니 신발이 나를 기억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발자취라 한다. 신발은 내가 걸어온 비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그 비밀을 아무에게도 실토하지 않는 착한 침묵으로 나를 지켜준다. 신발은 내 모습이며 나와 동행하는 유일한 친구다. 신발은 나의 아픈 곳을 미리 알고 내게 신호해 준다. 또 신발은 용케도 나의 옷을 돋보이도록 유혹도 한다. 초라해 보일 때는 굽이 높고 광채가 나는 금박이 하이힐이 나의 시선을 유혹한다.
그뿐아니라 하루를 끌고 가는 그림자처럼 나를 버리지 않는다.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지고 있을 때도 신발은 멀리 있지 않고 내가 퇴원할 때까지 내 옆에서 기다려 맨 먼저 위로해 주며 내 몸의 중심을 꼭 붙잡고 집으로 동행해 준다.
체중의 변화도 신속하게 감지하며 내가 편안하게 보행을 하도록 노력도 한다. 척추협착증 통증에 속도를 맞춰 내 집까지 기억하고 끌고 간다. 돌멩이나 움푹 파인 길도 용케 비켜 가는 마술사 같은 시력을 갖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신발은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다. 가슴에 옷핀으로 손수건을 접어 달아주더니 벽장에서 꽃무늬 고무신을 꺼내 주었다. 내 발이 신발 속으로 쏙 들어가니 헐렁했던 기억이 난다. 신발이 벗겨지지 않으려면 발가락에 힘을 주어야 한다는 걸 일주일 지나서야 터득했다. 여름방학이 되어서야 겨우 내 발과 고무신의 크기가 맞아 서로 사이좋게 놀았다. 고무줄놀이와 자치기, 숨바꼭질 때도 신발은 나를 벗어놓고 달아나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 흙 범벅이 된 신발은 지푸라기 서너 개 똘똘 말아 빨래비누로 닦으면 광채 나는 신발은 나를 기쁘게 한 유일한 나의 짝궁이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추석이 다가오면 시장에 다녀오신 어머니 가방에서 '색동 코고무신'을 꺼내면서 공부를 잘해야 또 사준다는 강제적 명령도 잊지 않으셨다. 중학교 교복을 입을 때도 검정 운동화를 사주셨고, 앞에 끈이 있는 멋쟁이 운동화는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사주셨다. 현관 신발장은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냥 지나칠 뻔했다가 문을 열고 보니 수십 년 동안 내 흔적이 담긴 신발이 나를 반기듯 추억을 되살려 놓는다. 맨 꼭대기에 발목이 무릎까지 닿는 부츠가 흙 밟은 흔적도 없이 얌전하게 포개 앉아있다. 딸이 생일선물로 보낸 신발이다. 나이 들어 걷기도 힘든 엄마의 모습은 모른 채 딸 중심의 생각으로 보낸 선물이다. 딸에게는 잘 신고 있다고 늘 말한다. 가장 외로운 신발이다. 신발이 나를 싫어할 뿐 아니라 신발을 떠받쳐 줄 미니스커트도 옷장에서 사 라진 지 오래다.부츠 옆에 흰 고무신이 빛바랜 시간을 안고 틈바구니에 끼어있다. 자녀들 결혼 때 한복차림을 해야 하는 부모는 구두 대신 고무신과 버 선을 신어야 했다. 신발에 매일 고맙다고 말한다. 신발장에 내 신발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사자(死者)의 신발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슬픈 신발의 운명이지만 신발은 반항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발에게 "네가 있어야 내가 산다"고 눈인사를 잊지 않는다. 요즘 늘 나와 함께 함께하는 신발은 운동화다. 그래서 옷과 잘 어울리도록 운동화를 색깔별로 몇 벌 샀다. 편하게 노닐 때는 운동화가 나를 사드락, 사드락 끌고 다닌다. 이제는 내가 운동화의 눈치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몸이 되어 간다.
운동화와 친해졌으면 좋겠다. 신발이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건강한 사람으로 살 것이다.
△이소애 시인은 한맥문학으로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샘문학동인, 전북시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빛연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감성시에세이' 외 다수가 있고, 한국문학비평가협회작가상과 전북예총하림예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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