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자성어는 개문읍도(開門揖盜. 열 개, 문 문, 읍할 읍, 도둑 도)다. 앞 두 글자 ‘개문’은 ‘문을 열다’란 뜻이다. ‘읍’은 ‘두 손을 들어 눈 높이에서 깍지를 끼고, 잠시 고개를 숙이는 인사법’이다. 그리고 ‘도’는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악인’을 뜻한다. 이 네 글자가 만나, ‘문을 열어놓고 공손히 절하며 도둑을 맞아들이다. 즉, 긴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빨리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재앙을 불러들이는 우매함’이란 의미가 만들어졌다.

손견(孫堅. 155~191)의 둘째 아들 손권(孫權. 182~252) 관련 일화에서 유래했다. 역사가 진수(陳壽)가 저술한 ‘삼국지(三國志)’의 ‘오지(吳志)’에 ‘개문읍도’ 이 네 글자가 나온다.
‘강동(江東)의 호랑이’ 손견은 용맹했지만, 36세에 전쟁터에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장남 손책(孫策)도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매복한 자객에 의해 큰 부상을 당했다. 손책은 동생 손권을 후계자로 결정한다. 이어 장소(張昭)와 주유(周瑜) 등 신임하던 이들을 불러 충성을 당부했다. 손권이 18세 때의 일이었다.

형이 세상을 뜨자, 손권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상복을 입고 매일 눈물만 흘렸다. 안타깝게 지켜보던 장소가 조언한다. “이처럼 애도만 하시는 것은 마치 문을 열어두고 도둑 무리를 영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손권은 상황의 심각성을 즉시 이해했다. 그날로 상복을 벗었고, 군대 사열 등 창장(長江) 중·하류 일대의 호족 세력 보스로서 통치를 시작했다.
강동의 1인자 자리를 계승한 손권은 3가지 난제에 직면한다. 첫째, 내부 반란 세력이었다. 손권은 군대를 진두지휘하기도 해가며 동요와 혼란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수습한다. 둘째, 북쪽 조조의 군사적 위협이었다. 이 난제는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했다. 손권은 화친과 전쟁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가능하면 유연하게 대처한다. 셋째, 서부 전선의 관리, 즉 유비와 제갈량의 독특한 리더십에 어떻게 제휴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할 것인가를 놓고 자주 고심해야 했다. 특히 이 마지막 난제는 상대가 단순하지 않아 지모(智謀)와 추진력, 군대의 기동성, 깔끔한 외교적 마무리 등 여러 방면 인재들의 협업이 필수적이었다.

손권은 26세일 때, ‘적벽대전(赤壁大戰)’을 경험하게 된다. 치밀한 준비를 마친 조조가 많은 병력을 이끌고 남침했기 때문이다. ‘조조에게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손권은 조조와의 전면전을 선택했다. 이해득실을 따져본 후, 손권은 유비가 내미는 손을 잡는다. 조조의 서슬 퍼런 공격 앞에서 둘은 어차피 같은 배를 탄 운명이었다.
주유와 제갈량은 ‘적벽’이 위치한 창장 남쪽 최전선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전투를 지휘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정교한 화공(火攻)을 펼쳐 조조의 수군(水軍) 대부분을 수장(水葬)시켰다.
이후, 손권이 통치하던 오나라는 적들의 침략엔 과감히 맞섰지만 먼저 대규모 군대를 일으키는 일은 최대한 자제했다. 그래서인지 위·촉·오 3국 리더들 가운데 손권의 야망이 가장 부족했다는 평가가 있다.

‘3국 가운데, 우린 실력이 둘째다. 일단 차분히 힘을 기르며 기다리자. 그러면 언젠가 상대의 치명적 약점이 드러나는 때가 올 것이다.’ 북쪽 위(魏)나라와 서쪽 촉(蜀)나라의 계속되는 도발에 손권은 대략 이런 셈법으로 일관했다. 이런 마음이었기에 손권은 늘 여유가 있었고, 장수(長壽)할 수 있었다. 조급함을 감추지 못하던 조조와 유비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급사하거나 한을 품고 세상을 뜬 것과 선명히 대조된다.
‘3국 시대’와 관련해, 이런저런 가설과 추론이 존재한다. 상상력이 가미된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넘쳐난다. 그러나 리더의 영민함이 조직의 운명을 가를 정도로 귀한 자산이라는 교훈만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간이 흘러, 결국 촉나라와 오나라는 차례로 멸망하는 비극적 순간을 맞이했다. 개문읍도. 손권에게는 훈장이었던 이 네 글자가 촉·오의 최후 통치자들, 즉 무능하고 어리석었던 유선(劉禪)과 손호(孫皓)에게는 씻기 어려운 오명(汚名)이 되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