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 비튼 ‘나의 완벽한 비서’···신선함과 역설 사이

2025-01-16

유능하지만 까칠한 보스와 그를 빈틈없이 보좌하는 비서의 사랑. 오피스 로맨스의 하위 장르 ‘비서물’의 전형이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2018), <저글러스: 비서들>(2017) 등 숱한 드라마가 이 소재를 활용해 로맨스를 펼쳐왔다. 하지만 성폭력 고발 운동 ‘미투’가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이후, 이 장르의 설 자리는 더 이상 없는 듯 보였다.

2025년 새해 벽두 등장한 SBS 금토 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는 이런 비서물의 계보를 잇는다. ‘밀착 케어 로맨스’를 표방하는 드라마답게 차가운 헤드헌팅 회사 대표와 센스 만점·돌봄 능력 최강인 비서가 주인공이다. 다소 얄궂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함께 일을 하며 사랑으로 바뀐다. 드라마 좀 봤다 하는 시청자에겐 ‘안 봐도 비디오’인 이야기인데 인기는 고공행진 중이다. 지난 3일 시청률 5.2%로 출발한 드라마는 방송 2주 차에 10%대 진입에 성공했다.

<나의 완벽한 비서>의 전략은 ‘성별 전복’이다. 남자 상사와 여자 비서 간 로맨스를 그린 그동안의 비서물과 달리 여자가 상사, 남자가 비서다. 지윤(한지민)은 창업 5년 만에 자신의 서치펌을 업계 2위로 만든 유능한 헤드헌터다.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지만 그 외엔 허당이다. 책상 위는 전쟁이라도 난 듯 서류와 명함이 굴러다니고, 밥은 누가 챙겨주지 않는 이상 거른다. 그저 차갑게만 보이는 그는 유일한 가족 아버지를 사고로 잃은 상처에 남몰래 아파한다.

그런 지윤에게 은호(이준혁)가 비서로 들어온다. 은호는 완벽한 비서다. 잘생기고 인품도 훌륭한데 일도 잘한다. 필요한 자료를 지시하기도 전에 착착 대령하는가 하면 지윤의 끼니와 신체·정신 건강까지 센스있게 챙긴다. 남자 상사의 넥타이 매무새를 고쳐주는 여자 비서가 아닌 흐트러진 여성 보스의 옷깃을 매만지는 남자 비서.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져 온 돌봄 노동을 남성이 완벽히 수행하는 모습은 장르적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드라마를 신선하게 만드는 힘이다. 까칠한 재벌 여성, 평범한 남성의 사랑으로 클리셰를 비틀며 흥행에 성공한 드라마 <눈물의 여왕>(2024)의 전략이 이번에도 통한 셈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가 그간 비서물이 직면해야 했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역시 이 전략 덕분이다. 앞서 언급된 <김비서가 왜그럴까> 등 드라마는 업무와 로맨스의 경계를 흐려 비서 노동의 전문성을 격하시키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 등 실제 비서의 현실을 지운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했다.

드라마는 헤드헌터인 지윤이 의뢰받은 채용 건을 하나둘 해결하면서 은호와 서서히 가까워지는 과정을 그린다. 사내 모략, 배신의 피해자란 공통분모는 지윤과 은호의 거리를 훌쩍 좁힌다. 인재를 뺏고 빼앗기는 냉혹한 헤드헌팅 세계에서 휴머니스트적 면모를 간직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빠지는 건 무척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성별 반전이란 묘안은 역설적이게도 기울어진 한국 사회의 성 역할을 강조하고 만다. 은호가 비서로서 발휘하는 자질 대부분은 그가 싱글대디라는 데서 온다. 그는 혼자 딸을 키우며 터득한 각종 돌봄 능력으로 지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라면을 먹는 지윤에게 딸의 머리끈을 건네고,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지윤에게 딸의 ‘핑크퐁’ 우산을 씌워준다. 그 순간 지윤의 눈에 ‘하트’가 떠오른다. 보통의 로맨틱한 관계에서 싱글맘의 지위가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은호는 싱글대디이기에 매력적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의 또다른 패착은 지윤이다. 지윤은 유능한 커리어우먼이지만 일상에서는 보통의 성인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실수가 잦다. 툭하면 여기저기 다치고 매일 타는 자기 차도 구분하지 못한다. 지윤의 빈틈은 은호의 완벽함을 빛나게 하는 수단처럼 활용된다.

완벽한 비서를 앞세운 두 작품 <나의 완벽한 비서>,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드라마 밖에서 만들어낸 화제가 얼마나 다른지 보면 이 차이는 한층 명확해진다. 전자는 은호의 다정다감함, 후자는 김비서(박민영)의 딱 달라붙는 ‘오피스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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