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생존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길원옥 할머니가 별세하셨다. 1998년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후 평생을 여성인권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2월19일, 제1688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진행되었다. 참담하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소속 극우 인사가 “길원옥은 돈 벌러 자진해서 (위안소로) 갔다”는 등의 망언을 외쳤다. 이는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뉴라이트 역사관의 전형적인 논리다.
12·3 내란 이후 K극우는 더욱 확장되고 더욱 대담해졌다. 이렇게 막 나갈 수 있는 자신감은 그동안 차근차근 쌓아온 ‘저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뉴라이트 역사관은 이들이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온 성장의 자양분이었다. 뉴라이트는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 자발적이었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을 부정하고, 일본제국과 ‘위안소’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왜곡해왔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자발성 논란’은 본질을 흐리는 뒤틀린 프레임일 뿐이다. 중요한 건 전시에 ‘위안소’를 운영한 일본군의 조직적 인권유린 및 성착취 자체다. 설사 ‘자발성’을 논한다 하더라도 그 핵심은 피해자들이 자발적으로 ‘위안소’에 갔느냐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느냐에 있다. 납치든, 사기 취업이든, 혹은 알고 간 것이든, 우리가 봐야 할 것은 한번 ‘위안부’로 등록되면 일본군의 ‘특종 군수품’으로 관리됐고, 자유롭게 떠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발성’ 운운은 기만일 뿐이다.
이들은 심지어 ‘위안부와 노무동원 노동자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모임’ 같은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원래 수요시위가 열리던 자리를 점거해 반대 집회를 여는 것은 물론 2024년부터는 ‘소녀상 철거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평화의 소녀상’에 검은 비닐봉지를 씌우거나 ‘흉물 소녀상을 철거하라’ 등의 내용이 적힌 어깨띠를 두르는 식의 조롱의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동상반대모임’이 결성된 2019년은 이영훈을 중심으로 한 뉴라이트 학자들이 <반일 종족주의>를 출간하고 뉴라이트 이데올로그로 부상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극우 세력과 ‘위안부’ 피해부정론자들은 하나라고 해도 무방하다. 사랑제일교회의 전광훈은 일본군 ‘위안소’에 대해 “공식적인 창녀촌”이라거나 “군대 이콜(=) 여자” 등의 망언을 한 바 있으며, 최근 서부지법에서 폭동을 선동한 혐의로 구속된 사랑제일교회 특임전도사 윤모씨 또한 수요시위에 참여한 여성 활동가들에게 “북한의 기쁨조가 되고 싶은 아가씨”라는 막말을 퍼부었던 인물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최란 부소장은 ‘여성신문’ 기고문에서 “서부지방법원 폭동 사태 생중계 장면에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 나타났다”고 썼다.
자극적인 말로 주목을 끄는 ‘망언’이 광장으로 나오고 유튜브로 스며들어 세력화되면서 “망언 네트워크”(김주희)가 완성됐다. 그리고 그 “망언 네트워크”가 현실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렇듯 뉴라이트의 ‘위안부’ 피해부정은 역사를 둘러싼 논쟁을 넘어선다.
그들에게 망언과 역사부정은 일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영을 갈라 ‘우리 편’을 결집시키는 정치 전략이자 성폭력을 남성의 본능으로 치부하고 여성에 대한 성착취를 정당화하면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질서를 유지하려는 문화 전략이다. 무엇보다, 여성과 전쟁 피해자의 목소리를 왜곡하거나 역사로부터 삭제함으로써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낡은 지배 전략이기도 하다.
소녀상에 검은 비닐봉지를 씌우고선 좋다고 낄낄거리던 그 얼굴은 알고 있을까? 검은 비닐봉지가 뭉개는 건 소녀상이 대변하는 평화 메시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인간성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