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청소년 마음건강 리포트 선별 치료에서 보편적 예방으로

“그냥 상담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러 왔어요.”
상담교사가 민재(가명)를 처음 만난 건 3월 초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상담실을 찾아왔다.
민재는 밝은 얼굴로 이것저것 물었다. 교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민재의 기록을 살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했던 정서·행동특성검사 결과를 확인해 보니 줄곧 ‘정상군’에 속해 있었다. “언제든 또 와.”
그 후로도 민재는 두어 번 더 상담실을 찾았다. 교사와 일상적이고 평범한 대화를 나눴을 뿐 별다른 징후나 기색은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 민재가 ‘위험한’ 아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없는 죽음
3월 마지막 주말, 민재는 집에서 자살 시도를 했다. 주변 사람들이 더 충격을 받았다. 그 애가 왜 그랬을까. 의젓하고 친구도 많고 학교생활도 잘하던 아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날 민재는 집을 나와 아파트 옥상으로 향했다. 다행히 일이 벌어지기 전에 아이를 발견해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상담교사가 이유를 물어도 민재는 “저 진짜 괜찮아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긴 설득 끝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재의 부모님은 어린 나이에 만나 결혼했다. 두 사람이 이혼한 뒤 민재는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생계 때문에 아버지는 늘 바빴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며 마음에 병이 생겼지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숨겨왔다.
“그동안 너 참 외롭고 힘들었겠다.”
상담교사의 한마디에 민재는 눈물을 쏟았다.
“선생님, 사실 저 안 괜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아요.”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아동청소년(10~19세) 자살자 수는 370명이었다. 하루에 한 명씩 자살로 아이들을 잃은 셈이다. 우리나라 아동청소년 사망원인 1위도 ‘자살’이다. 교통사고나 병으로 죽는 아이보다 자살로 죽는 아이가 더 많다.
전문가들은 아동청소년의 자살이 성인보다 예측하기 훨씬 어렵다고 설명했다. 문제를 알아채는 것부터 쉽지 않다. 사춘기 시기와 겹쳐 있어서 발달 단계상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 내면의 문제 때문인지 본인도 모른다. 가족이나 선생님도 분간하기 힘들다.
마음의 어려움이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울감과 불안감이 두통, 복통, 메스꺼움 등 신체 증상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학교 보건실에 지나치게 자주 가는 아이들을 따로 불러 대화해보면 마음건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게 상담교사들의 설명이다.
우지향 서울 선사고등학교 전문상담교사는 “아이들이 가진 심리정서적 어려움은 발달단계를 따라 나선형으로 움직인다”면서 “해소된 것처럼 보여도 특정 스트레스나 계기로 갑자기 증폭하면서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시스템이 놓친 아이들
교육부는 마음건강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사전에 발굴하기 위해 초등학교 1·4학년,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매년 ‘정서·행동특성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검사에서 관심군으로 분류되면 위센터나 정신건강복지센터 등 전문기관으로 연결돼 치료를 받는다.
하지만 정작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은 검사를 피해 간다. 신혜정 홍대사대부고 전문상담교사는 “자가 진단 형태의 검사라서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가 있다”면서 “낙인이 찍힐까 봐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교육부의 ‘학생 자살사망 보고서’에 따르면 2017~2023년 자살한 초·중·고등학생 10명 중 7명이 정서·행동특성검사에서는 정상군에 속해 있었다. 또 사망한 학생의 73%는 자살 직전까지 특별한 행동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생활에도 문제가 없었고 출결 상태도 양호했다.
내면의 불안과 우울을 숨긴 채 살아가는 이른바 ‘침묵군’ 아이들은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있다. 검사에서도 정상군으로 분류되고 평소에도 별다른 이상 행동을 보이지 않아 발견이 어렵다. 자살 시도나 사망 사건이 발생해야 바깥으로 드러난다.
죽은 사람이 남긴 단서를 통해 자살의 이유를 밝히는 것을 ‘심리부검’이라고 한다. ‘모범생’ 주호(가명)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심리부검이 진행됐다. 고등학교 2학년 주호는 전교에서 손가락 안에 꼽힐만큼 성적이 뛰어났다. 학급 회장을 맡을 정도로 성격도 활발했다. 예의 바르고 세심해서 선생님들도 주호를 무척 아꼈다.
유족과 주변인 진술을 바탕으로 심리부검을 한 결과 주호에게는 영재 소리를 듣는 형제가 있었다. 일반고에 다니는 모범생이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벽. 비교당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심각했지만,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는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살았다.
류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아동권리실장은 “위기 아동을 선별해 치료하는 시스템에서는 놓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면서 “모든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예방적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죽고 싶은 아이는 없다
규영(가명)이는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자살 시도를 했다. 오랜 기간 학교폭력에 시달렸지만, 부모님께 말하지 못했다. ‘말해봤자 해결은 안 되고 부모님만 힘들어지겠지. 죽어야겠다.’
예측할 수 없는 죽음, 예방이 필요하다

투신한 아이는 온몸 뼈가 부서져 수술을 여섯 번이나 받았다. 휠체어를 타고 상담센터를 찾아온 규영이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한 번도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요. 살고 싶었어요. 죽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고통을 끝내고 싶어서 그랬어요.”
3년째 규영이를 상담하고 있는 박상미 힐링캠퍼스 더공감 대표는 “세상에 죽고 싶어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자해할 때 눈에 잘 띄는 곳에 합니다. 손등이나 목이 가장 많아요.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도와달라는 신호예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서 ‘나 좀 봐 달라’ ‘살려 달라’는 뜻으로 자해하는 거예요.”
해외 여러 국가들은 ‘사회정서교육’에서 해법을 찾고 있다. ▶아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고 ▶관리하며 ▶표현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적·정서적 역량을 강화하는 교육이다.
미국·영국·호주·프랑스 등에서는 사회정서교육을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하거나 필수교과로 지정해 모든 아동청소년이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히도록 하고 있다. 감정을 인식하고 조절하는 것,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법,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법 등이 포함돼 있다.
한국에서는 유니세프가 시작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함께 개발한 사회정서교육 프로그램을 한국 상황에 맞춰 보완한 뒤 2022년부터 서울 시내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4만명이 교육을 받았고 올해도 7만5000명이 수업을 신청했다.
교육부도 지난해부터 사회정서교육을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다. ‘학생 맞춤형 마음건강 통합지원 방안’을 발표하며 사회정서교육 도입을 발표했다. ‘예방’ 위주로 시스템을 바꾸겠다는 뜻이다.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회정서교육을 ‘정규교과’로 편성해 의무화해야 한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서로의 관찰자가 되다
“선생님, 이 워크북 집에 가져가도 되나요?”
창의적체험활동(창체)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이 교사를 찾아왔다. ‘미래의 나에게 편지쓰기’ 페이지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좀 더 잘 써보고 싶어서요.”
이날 홍대사대부고 3학년 창체 시간에는 유니세프의 마음건강 프로그램 ‘나를 찾는 마음여행’ 수업이 진행됐다. 신혜정 전문상담교사는 “대입 준비로 바쁜 고3 학생들이 편지 쓰기를 그렇게 열심히 할 줄 몰랐다”며 웃었다.
“학생들 각자 책(워크북)을 한 권씩 받았어요. 8차시에 걸쳐 나의 마음, 감정, 스트레스, 자존감, 관계 등에 대해 기록할 예정입니다. 일종의 ‘마음 포트폴리오’ 만들어보는 거예요. 애들이 손으로 쓰는 걸 싫어하는데 이건 재밌어하네요. 마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서울 선사고등학교는 정규교과 시간에 사회정서교육을 진행한다. 영어 시간에는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 내용을 영문으로 발췌해 불안이란 무엇인지, 자신의 불안은 언제 시작됐는지, 어떻게 해소하는지 이야기를 나눈다. 미술 시간에는 자화상 그리기를 한다. 타인이 보는 내 모습과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며 간극을 줄이는 방법에 대해 대화한다.
우지향 선사고 전문상담교사는 “평소에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던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고 있다”면서 “선생님들도 교과 수업할 때는 몰랐던 아이들의 표정을 발견했다며 만족해한다”고 말했다.
“모두가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지 않으니 서로가 ‘관찰자’가 돼 주는 게 중요해요. 표정, 행동, 징후를 살피고 어떤지 물어봐 주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살 시도로 모두를 놀라게 했던 민재는 주변의 관심 속에 차츰 회복됐다. “이제 숨기지 않고 마음을 말하면서 살 거예요.” 민재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만신창이였던 규영이의 몸과 마음도 다시 살아났다.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청소년들을 돕는 ‘심리상담사’가 되겠다는 꿈도 갖게 됐다.
전문가들은 아동청소년의 마음건강을 돌보는 게 장기적으로 한국의 자살률을 낮추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너무 늦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반드시 회복한다.
‘마음건강 문해력’이 아이들을 살린다
아동청소년 마음건강 리포트 조미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인터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아동과 청소년의 마음건강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심화됐다. 유니세프는 2021년 ‘세계 아동 보고서’를 통해 아동의 마음건강 문제를 주요 우선 과제로 지정했다. 한국의 상황은 특히 심각하다. 아동청소년 사망원인 1위가 12년째 ‘자살’이다. 아이들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낮아지고 스트레스, 우울감 등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이하 유니세프)는 국내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마음건강 증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장 전문가들과 함께 교육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자료집을 제작한 뒤 2022년부터 서울시교육청을 통해 배포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서울 마포구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사옥에서 만난 조미진 사무총장은 “건강한 사회구성원이 건강한 사회를 지속시키는 토대”라면서 “모든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예방적, 보편적 마음건강 지원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저개발국 아이들 지원사업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국내 아동들을 위한 마음건강 사업을 시작한 계기가 있다면요.
“유니세프는 전 세계 모든 어린이의 권리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활동합니다. 우리의 태그라인인 ‘모든 어린이를 위해(for every child)’에는 한국의 어린이와 청소년도 포함되죠.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 그들의 마음건강이 위기라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마음건강 문제가 방치되면 성인이 돼서도 우울증, 불안장애, 자살 등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위험이 커집니다. 더 적극적으로 아이들의 마음건강을 돌보고 살펴야 해요.”
우리나라 아이들의 마음건강은 어떤 상황인가요.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지만 아동이 행복한 나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극심한 경쟁 풍토와 아이들을 독립된 인격제로 존중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문화 때문이죠. 국내 아동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참담한 현실이죠.”
어떤 해결책이 필요할까요.
“유니세프 마음건강 프로젝트의 핵심은 ‘예방적 접근’입니다. 치료보다는 예방과 증진을 위한 체계를 구축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많은 아이가 마음속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어떻게 표현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몰라요. 저희는 그 답을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마음건강을 관리하고 증진할 수 있는 역량인 ‘마음건강 문해력’에서 찾았어요.”
마음건강 문해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자신의 마음을 읽고 표현하는 능력이죠.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도움을 요청할 수 있잖아요. 주변에 ‘도와달라’고 말할 수만 있어도 훨씬 많은 아이를 구할 수 있습니다.”
유니세프는 서울시교육청과 협약을 맺고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마음건강 관리에 관한 교육자료를 배포하고 있다. 사후 평가 결과, 교육을 받은 학생들의 감정 조절, 스트레스 관리, 문제 해결, 대인관계 기술 등이 전반적으로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뿐 아니라 보호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자료도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가정과 보호자가 아이의 마음건강을 위한 1차 예방주사, 즉 ‘백신’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감정과 생각은 전염되기 때문에 부모의 행복한 마음이나 우울한 마음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해집니다. 보호자가 ‘마음건강 문해력’을 함께 키워야 아이를 더 잘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보호자 교육자료를 개발했어요.”
올해 마음건강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교육부와 협력해서 마음건강 교육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또 마음건강 문해력 교육을 정규교과에 편입하기 위한 입법과 정책 옹호 활동도 진행할 예정이에요.”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왔나요.
“3월 24일 서지영 의원실과 함께 ‘아동 마음건강 통합적 지원 체계 마련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마음건강 통합 지원법(가칭)’의 필요성과 방향성에 대해 논의했어요.”
인상적인 발언들이 있었나요.
“여러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한 부분은 아동 마음건강을 관리하는 정부 부처가 분절되어 있다는 점이었어요. 학생 문제는 교육부, 치료는 보건복지부, 학교밖청소년은 여성가족부가 담당하는 등 부처 간 역할이 분리돼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으니 협력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조미진 사무총장은 “현장 활동과 입법 활동을 통해 지속적인 변화를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마음건강은 모든 아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정부·학교·가정·지역사회가 협력해 아이들의 마음건강을 지지할 수 있는 통합적 시스템을 만드는 게 유니세프의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