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규 칼럼] 고종의 길 = 비극의 길

2025-12-17

덕수궁 뒤편 담장 넘어 끝자락에는 옛 러시아공사로 가는 돌담길이 있다. 박원순 시장 시절 ‘고종의 길’로 명명하여 산책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많은 상념에 빠진다. ‘망국의 길’ ‘비극의 길’로 명명했으면 좋았으련만... 조선이 일본에 왜 접수됐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고종은 1895년 일본 낭인들의 손에 의해 왕비 명성황후를 잃고 실질적인 권력까지 친일 내각에 빼앗겼다. 이후 고종은 사실상 가택 연금을 받았다. 이때 친러 인사들이 하나의 제안을 해왔다.

그 제안이란 바로 고종과 세자 이척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하는 , 즉 ‘아관파천’이다. 임금이 궁궐을 떠나 다른 곳에서 난을 피하자는 것이다. 고종과 세자는 궁녀들이 타던 가마로 위장,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다. 동방진출을 노리는 러시아로서는 호박이 넝쿨 채 굴러오는 기회를 잡았다. 러시아는 산업혁명과 함께 대국으로 등극한 영국과 프랑스 등과는 달리 뒤늦게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하지만 영국의 제재로 인해 더 이상 유럽으로의 남하가 힘들었다. 러시아는 동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시베리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과 만주, 한반도까지 노렸다. 블라디보스톡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러시아어로 ‘블라디=정복하라, 보스톡=동쪽’이다.

서양은 당시 조선과 일본을 통해 러시아 남하를 막으려 했다. 자신들이 직접 와서 막기에는 너무 멀었다. 특히 주둔시킬 군병력이 없었다. 따라서 바닷길은 일본, 내륙은 조선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전략이었다. 일본의 메지지유신 역시 이 같은 전략의 파생상품이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한 일본시찰단 역시 같은 차원에서 이뤄졌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대통령은 시찰단에게 강의를 통해 결정적인 비법까지 가르쳐주었다.

“당신네 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처럼 식민지가 있느냐? 러시아처럼 대국이냐? 자원은 있나? 무슨 수로 영국과 프랑스를 따라갈 수가 있느냐? 우리 독일은 식민지가 없다. 오로지 기술을 통해 제품으로 수출 강국이 되었다. 우리 독일처럼 기술로 승부해라.”

일본은 서양의 물심양면 적극적인 지원 아래 독일 베끼기에 나섰다. 1854년 미 ·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도 체결했다. 또 700년의 막부시대를 종식하고 천왕을 중심으로 한 왕정복고 시대가 열린 것도 결정적이다. 기득권이 없는 신흥세력과 서방세력의 러시아남하 저지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 작품이 ‘메지지유신’이다. 얼마안가 일본은 ‘러-일 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정도로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다.

반면 조선은 ‘쇄국의 길’로 갔다.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 오페르트 도굴사건(1868년)도 발생했다. 결국 열강들은 조선인을 바보로 여겼다.

“한국인은 본래 일본인 또는 중국인과 같은 수준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다. 사물을 제대로 보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패했기 때문에 자력으로 훌륭한 사회를 만들고 지켜나갈 수가 없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인종적 결함과 낡고 뒤떨어진 정치 사회제도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는 후진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한국이란 극동의 모든 나라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의 나라이며, 조선민족은 가장 문명이 뒤진 미개한 인종이다. 반면 일본은 엄한 정치의 나라이며 일본 민중은 지성과 활력 혈기 넘치는 문명국민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1905년 언론인 G 케난에게 보낸 편지 내용)

"한국인의 민족성 자체가 단결 정신이 부족하다. 민족 혁명을 영도할 위대한 영수(領袖)가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 사상이 결핍돼 있다. 각 당파 간에 극심한 시기·질투·견제 현상이 난무하고 있다. 한국 민족은 개성이 워낙 강한 데다 자존심이 세며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강하다.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들을 무능하다고 비웃으며, 나이 든 사람들은 청년들이 유치하고 무지하다고 손가락질하기 일쑤다. 사람마다 품고 있는 마음이 다르고, 타인의 말을 들으려는 정신이 부족해 의견이 엇갈리고 당파가 난립했다. 서로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급급해 전혀 양보하지 않는 당파들이 진정한 통일을 이루는 것은 지극히 어려워 보인다." (1939년 10월 5일 중화민국 중앙조사통계국 관리 왕룽성(汪榮生)이 작성한 보고서)

열강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일본은 러일전쟁에 이어 곧바로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을 접수했다. ‘카스라-테프트 밀약’의 결과물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서양으로부터 당한 수법을 그대로 조선에 사용했다.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했다. 22년 전에 미국에 당한(배운)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아관파천’=‘조선패망’이 된 셈이다.

지금도 그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반도 서남쪽 사람들은 대부분 ‘좌파’, 동남쪽 사람들은 대부분 ‘우파’(최근 PK(부산·경남)에서는 다소 변화가 있음)인 나라, 지역감정만 잘 이용하면 집권이 가능한 나라, 그리고 좌우만 있을 뿐 중도는 절대 용인되지 않는 나라, 집권과 함께 권력의 요직을 자신들이 독점하는 나라. 조선왕조 말기와 다를 게 없다. 정부와 공기업, 정부 입김이 닿은 기업의 요직은 정권에 따라 영남 또는 호남 일색으로 바뀐다. 꿀단지 맛을 본 그들은 숨어서 웃는다.

국제사회는 조폭 세계와 같다. 도덕, 명분, 인정은 없다. 오로지 힘만 존재할 뿐이다. 배신은 절대 용납안된다. 조선말 지도자들이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었더라면 러-일전쟁은 조-일-러전쟁이 됐을 것이다. 지금 만주는 조선 땅일 가능성이 높다. 한-일합병은 물론 남북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고종의 길’ 주변에는 미대사관저로 사용했던 미대사관 제2청사와 영국대사관, 구세군회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옛 덕수궁 궁궐들이 있던 자리다. 남의 나라 왕궁을 열강들이 강탈한 것이다.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역사는 “만일에...”라는 가정이 없다. 하지만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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