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로츠키(1879~1940·사진)는 우크라이나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수재라는 말을 들었다. 인생은 결국 인연인데, 그도 레닌을 만난 것이 운명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선두가 되었으며, 혁명에 성공하자 건국 이인자로 추앙을 받으며 페트로그라드의 총서기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는 선동적인 웅변에 탁월했으며, 독일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으나, 여운형(呂運亨)의 회고에 따르면 영어는 서툴렀다. 혁명 기간에 시베리아 유형을 겪었다. 레닌도, 트로츠키도, 국민도 그가 레닌의 후계자라는 데 의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스탈린이 정권을 잡으면서 그의 운명은 뒤바뀌기 시작했다. 이론상으로 보면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했고, 트로츠키는 국제영구혁명주의자여서 공생할 수 없었다지만, 그 배후에는 우크라이나 출신과 그루지야 출신 사이의 인간적인 애증이 깔려 있었다.
그는 1929년에 추방되어 터키·프랑스·노르웨이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했다. 멕시코 대통령이 특별 열차를 제공하고 그 유명한 화가 프리다 칼로가 영접을 나왔다. 그들은 젊은 시절부터 내연의 관계였다. 그는 망명 중에도 스탈린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다가 1936년에 궐석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
트로츠키는 몇 차례 스탈린의 암살 공격에 시달리다 좀 더 외진 코요아칸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추격은 멈추지 않았다. 스탈린은 스페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미남 라몬 메르카데르를 고용하여 트로츠키의 딸에게 접근하도록 했다. 딸은 그를 진실로 사랑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인사차 들린 메르카데르는 우비 안에 숨긴 빙산용 피켈로 트로츠키를 찍어 죽였다. 메르카데르는 20년 징역을 마친 뒤 러시아로 돌아가 레닌 훈장을 받고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정치란 화려한 듯하지만 그토록 비정하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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