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이 제조업 상황을 가리켜 “10년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어디 제조업뿐일까. 지난 10년(대략 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권)은 정치가 극한 대립 속에 기능부전(機能不全)에 빠진 기간이다. 소득주도성장 같은 포퓰리즘이 판쳤고, 새로운 산업 정책·전략은 추진하지 못했다. 그사이 중국은 우리를 따라잡고 추월했다. 환자로 치면 당장 손써야 하는 응급 상황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경제는 수술을 가로막는 거대한 모순과 마주하고 있다.
주 52시간, AI 등 R&D 발목 잡아
당정은 불황에 법인세 인상 추진
평등주의, 기업 옥죄기 타파해야
우선, 획일적 평등주의. 이재명 정부는 ‘인공지능(AI) 3대 강국’을 목표로 잡았다. 그런데 AI 강국이 되자는 나라의 연구개발(R&D) 현장이 주 52시간 규제에 묶여 있는 걸 어떻게 봐야 하나. 미국의 오픈AI, 일론 머스크의 xAI, 중국의 딥시크 등은 이런 식의 근로시간 규제와 거리가 멀다. 몰입해서 강도 높게 일하고, 대신 그 성과에 대해 확실한 보상을 준다. 가뜩이나 뒤처진 한국 기업들이 주 52시간을 지키며 세계 정상의 기업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적어도 첨단기술 R&D 분야만이라도 획일적 규제를 걷어내야 한다.
현재 AI 양대 강국인 미국과 중국의 AI 분야엔 평등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 잘하는 곳에 몰아주는 것이 공통점이다. 미국은 시장이, 중국은 정부가 그렇게 한다. 한국에서 평등주의가 가장 격하게 표출되는 분야가 교육이다. 이 대통령은 지방 국립대에 예산 지원을 통한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공약했다. 그런데 서울대만 해도 세계 선두권엔 한참 못 미친다. 영국 QS의 2025년 대학평가에서 세계 38위, 미국 ‘US 뉴스 & 월드 리포트’ 평가에선 세계 133위다. 서울대에서 지난 4년간 해외 대학으로 떠난 교수가 56명이나 된다. 외국 대학에 비해 처우와 연구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일등이 세상의 표준을 정하는 AI 시대에 대처하려면 국내 1위권 대학 양산보다 세계 최정상급 대학 육성이 시급하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국내 대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릴 국가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평등주의에 젖은 획일적 보상·지원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한다.
또 다른 모순은 ‘경제 살리기’와 ‘기업 옥죄기’. 말로는 경제성장을 외치는데 정작 정책은 기업 발목 잡는 것들이 쏟아진다. 1차 상법 개정이야 주가 부양이 명분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기업에 경영 안정성을 지킬 제도, 헤지펀드에 물어뜯기지 않을 방어 장치라도 만들어 줘야 하지 않나.
민주당과 정부의 법인세 인상 추진은 모순의 압권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22%로 낮아졌던 법인세 최고세율은 문재인 정부에서 25%로 올랐다가 윤석열 정부에서 24%로 내렸다. 그걸 다시 올리겠다는 거다. 구윤철 부총리는 인사청문회 때 “세금 깎아 주면 기업이 투자를 하고 그게 선순환 구조로 갈 거라고 예상했지만, 법인세는 2022년 거의 100조원에서 지난해 60조원으로 40%나 빠지며 성장도, 소비도, 투자도 줄어드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왜곡에 가깝다. 2023~2024년 법인세 수입 감소는 감세보다 극심한 불황에 따른 실적 부진 탓이 컸다. 매년 수조원의 법인세를 내 온 삼성전자만 해도 반도체 수요 절벽에 부닥쳤던 2023년 11조원 넘게 적자를 내고 법인세를 한 푼도 내지 못했다. 경제사령탑의 인식 수준이 그 정도라면 경제 회생은 더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세금은 경기가 좋을 때 많이 걷고, 경기가 나쁠 때 덜 걷는 것이 경제학 이론에도 맞고, 세상 이치에도 맞는다. 하물며 국세청 세무조사도 불황엔 자제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경기가 IMF 위기보다 어려운데 세수가 부족해 법인세를 올린다는 것은 거위의 배를 가르겠다는 발상이나 다름없다.
획일적 평등주의와 기업 옥죄기 풍토를 타파해야 경제에 활로가 생긴다. 진보 정권이 실용 정부를 표방한 지금이야말로 모순을 바로잡을 좋은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