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거자일소(去者日疏)와 소명태자(昭明太子)

2026-01-05

이번 사자성어는 거자일소(去者日疏. 갈 거, 사람 자, 날 일, 성길 소)다. 앞 두 글자 ‘거자’는 ‘떠난 사람’이다. ‘일소’는 ‘나날이 소원해진다’란 뜻이다. 이 네 글자가 합쳐져, ‘떠난 사람은 차츰 잊혀지게 마련이다’란 의미가 만들어졌다.

양(梁)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 501~531)가 편찬 책임을 맡은 ‘문선(文選)’에 시인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고시(古詩) 19수(首)가 실려있다. 이 가운데 14번째로 등장하는 작품의 첫 구절은 ‘거자일이소(去者日以疎)다. 여기에서 유래한 ‘거자일소’는 원래 ‘먼저 세상을 하직한 이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잊혀진다’란 의미였다. 요즘엔 ‘생활하는 곳이 멀어지면 자연스럽게 소원해진다’란 확장된 의미로 자주 쓰인다.

소명태자는 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에 태어났다. 자(字)는 덕시(德施)다. 그의 부친 양무제(梁武帝. 464~549)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였다. 본래 그는 남조 가운데 두 번째 왕조였던 남제(南齊)의 방계 황족이었다. 폭군이던 황제가 신변을 위협하자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후, 38세 젊은 나이에 양나라를 건국하고 무려 47년을 황제 자리에 머물렀다. 향년 85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양무제는 스님들의 육식을 엄격히 금한 ‘단주육문(斷酒肉文)’ 포고령을 처음으로 선포한 바로 그 황제다. 스스로도 육식을 삼가고 불교 계율을 지켜 사람들은 그를 ‘황제보살’로 불렀다. 불교 경전 해설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도한 숭불 정책이 낳은 폐단에 ‘후경(侯景)의 난’까지 겹쳐 통치 후반기엔 여러가지 위기를 겪기도 한다.

소명태자는 두 살 무렵에 황태자로 책봉됐다. 평균연령이 약 40세인 시대에, 37세에야 첫 아들을 얻은 양무제가 후계자 결정을 최대한 서둘렀기 때문이다. 남달리 총명했던 소명태자는 부친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기억력도 뛰어났다. 다섯 살에 오경(五經)의 많은 분량을 암송해 부친과 스승을 놀라게 했다.

하루는, 양나라 3대 법사로 꼽히는 법운(法雲)이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소명태자에게 불경 강론을 청한다. 당시 18세 청년이던 소명태자는 당연히 사양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계속되는 스승의 요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마침내 법좌에 올라 강론을 펼쳤다. 강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고승들이 따로 준비한 난이도 높은 질문에도 무리없이 대답하자, 이후 그의 정통한 불교 이해를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소명태자가 황제에 오르면 많은 선정(善政)이 펼쳐질 것으로 양나라 백성들은 기대했다. 그가 서민들의 어려움을 적극 배려하는 정치가의 자질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라에 흉년이 들면 즐기던 음식을 멀리하고 겨우 허기만 채웠다. 세금과 노역에 힘들어하는 백성을 마주할 때면 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애석하게도, 소명태자는 질병을 앓다가 31세에 서둘러 세상을 떴다. 슬픈 소식을 전해들은 수도의 남녀 대부분이 궁문으로 달려와 울부짖고 통곡했다는 기록이 양나라 역사서 ‘양서(梁書)’에 남아있다.

‘문선’에는 양나라 이전까지의 문학적 성취인 시문(詩文)과 사부(辭賦), 약 700편이 충실히 정리되어 있다. 훗날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만개(滿開)한 고급 문화가 소명태자의 ‘문선’ 덕분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성종(成宗) 시대에 서거정(徐居正)이 책임을 맡아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했다. 삼국 시대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시와 문장 가운데 뛰어난 작품들을 모은 시문집(詩文集)이다.

거자일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반드시 뒤따른다. 어느 원로 배우가 세상을 떴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장기간 추모하며 애틋한 감정에 사로잡힌다면, 이유가 작품에서 발휘한 그 연기 기량 때문일까, 아니면 무대 밖 삶에 아로새겨진 이런저런 인간적 자취의 매력 때문일까?

소명태자, 간디 그리고 링컨(Lincoln).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들으면 그가 속했던 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이 깊은 슬픔을 오래 체험하게 되는 인물들이 간혹 있다. 어떤 분야에서 누군가 생전에 최고 지위를 누렸다는 것과 사망 후의 상실감이 얼마나 길게 이어지느냐는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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