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포인트
감독 공수창
배우 감우성, 손병호, 이선균, 박원상, 김병철
상영시간 106분
제작연도 2004년
영화를 사랑하고, 특히 호러 영화를 사랑하는 기자가 ‘호달달’ 떨며 즐긴 명작들을 소개합니다. 격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
‘관등성명’(官等姓名)이란 보직·계급·성씨·이름을 뜻한다. 군대에서 상관이 부르거나 상관과 악수하면 “병장 허진무!” 하는 식으로 관등성명을 외친다. 그런데 군복무를 하기 전에도 공수창 감독의 <알 포인트>(2004)를 보고 관등성명을 배울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상대가 전우인지 귀신인지 모를 공포에 휘말린 소대장은 외친다. “관등성명! 관등성명!” 부대원들이 오직 관등성명으로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확인하는 장면은 가히 군대 정훈자료로 쓸 만하다. <알 포인트>는 개봉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 밀리터리 호러 영화의 최고 명작으로 꼽힌다.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72년. 최태인 중위(감우성)는 혼바우 전투의 유일한 생존자로 산전수전을 겪은 군인이다. 한중현 중령(기주봉)에게 본대 복귀를 부탁하지만 ‘두더지 셋’ 수색대 소대장으로 임명된다. 6개월 전에 베트남 작전지역 ‘로미오(R) 포인트’에서 1명만 살아남고 몰살당한 ‘당나귀 삼공’ 부대의 구조 요청 무전이 감지됐기 때문이다. 최 중위의 임무는 이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다. 선임하사인 진창록 중사(손병호), 박재영 하사(이선균), 장영수 병장(오태경), 마원균 병장(박원상), 오규태 병장(손진호), 조병훈 상병(김병철), 변문섭 상병(문영동), 이재필 상병(정경호)이 합류한다.
<알 포인트>의 미덕은 ‘감추기’에 있다. 통상 호러 영화는 귀신, 괴물, 살인마 등 공포의 존재를 ‘보여주기’로 관객을 심리적 극단에 몰아붙인다. <알 포인트>에도 물론 귀신과 시체가 등장하지만 공포의 존재를 감췄을 때의 재미가 진국이다. 분명 뭔가 존재하긴 하는데 보이지 않는 공포가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심장을 짓누른다. 어느샌가 귀신이 자신들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이 특히 유명한데, ‘감추기의 공포’가 제대로 통하면서 소름이 돋는 명장면이다.
수색대원들은 불가사의한 사건을 겪으면서 차례대로 죽어가는데 원인을 알 수 없다. 총격전 끝에 죽는 베트남 소녀 전사, ‘피를 묻힌 자, 돌아가지 못한다’고 적힌 비석 등의 단서가 등장하지만 참사의 원인이 원한인지 저주인지 끝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죄책감, 고립감, 절망감에 시달리던 대원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영에 자멸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베트남 정글(실제 촬영지는 캄보디아)의 찜통 열기와 신비로운 분위기가 더해져 고수(비누처럼 특이한 향이 나는 채소)를 팍팍 뿌린 듯하다.
사실 알쏭달쏭한 서사는 영화 제작이 엎어지고 감독이 두 차례나 교체되면서 여기저기 구멍이 났기 때문이다. <하얀 전쟁>(1992) <링 한국판>(1999) <텔 미 썸딩>(1999) 등의 각본가였던 공수창이 느닷없이 연출을 떠맡게 됐다. <알 포인트>를 찬찬히 살펴보면 미처 회수하지 못한 복선이 눈에 띤다. 하지만 그런 미완의 결말이 오히려 기괴한 매력을 주고 수많은 해석을 낳았다. <알 포인트>가 흥행하면서 공수창은 뜻밖에 감독 데뷔를 화려하게 마쳤고, 당시 신인 배우였던 감우성·이선균·박원상 등도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알 포인트>의 ‘흥행 대박’은 영화 내용이 실화인 것처럼 꾸민 마케팅 덕도 있었다. 홍보용 인터넷 홈페이지에 영국인 종군기자의 사건 일지를 창작해 실제처럼 올려놨다. 배경은 베트남이지만 실제 촬영지는 캄보디아였다. 붉은 이끼로 뒤덮인 로미오 포인트 폐허 건물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들의 호텔이었던 ‘보코어 힐 스테이션’이다. 현재는 일대가 휴양지로 개발되면서 건물도 리모델링돼 영화 속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