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가 하지 말라는 일 골라 하다 몰락

2025-05-13

100년 전 부잣집, 어떻게 기울었나 ②

황금기 향수, 경제 박탈감이

포퓰리즘 등장의 토양 제공

이익보다 많은 세금 물린 탓

세수는 줄고, 지하경제 키워

“세계엔 네 종류의 나라가 있다. 선진국, 후진국, 일본, 그리고 아르헨티나.”

1971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사이먼 쿠즈네츠의 말이다. 아르헨티나가 그만큼 특이한 나라라는 뜻이다.

20세기 초 아르헨티나는 세계 5대 부자에 꼽히던 금수저 국가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프랑스·독일보다 높았고, 스페인의 거의 배에 달했다. 당시 유럽 이민자들이 뉴욕으로 갈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갈지, 고민했을 정도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엔 LA보다 80년이나 앞선 1913년 지하철이 개통됐다. 지금도 건재하다.

그러다 대공황에 이어 포퓰리즘과 군부독재의 실정을 거쳐 쇠락했다는 건 다 알려진 일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헤럴드의 칼럼니스트 릴리아나 프랑코는 분배 중심의 정치를 쇠락의 범인으로 지목한다.

“분배 중심의 정치가 자리 잡으면서, 저축 인내 노력과 같은 기본적인 가치들이 약화됐다. 이렇게 몇 세대가 지나자, 국가는 마치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이며, 복지를 책임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다. 페로니즘은 이를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가가 뭐든 다 해주다 보니,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여느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라졌다. 가전업체 피바디의 사주 최도선 회장은 포퓰리즘에 길든 근로자들의 가치관을 지적한다.

“포퓰리즘으로 인해 3~4대째 정규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아버지가 매일 출근하는 걸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시간 지켜 일하러 나가는 걸 문화적으로 못 받아들인다.”

포퓰리즘과 동의어로 통하는 페로니즘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니다. 세상만사, 객관적 여건과 주관적 의지의 결합으로 이뤄지는 법. 대공황 이후 서서히 하락세를 보인 아르헨티나에선 과거 번영에 대한 향수와 상대적 박탈감이 쌓여갔다. 이게 기성 엘리트에 대한 불신과 겹쳐 곧 폭발할 듯한 거대한 정치 에너지로 부풀어 올랐다.

이 흐름을 포착해 권력을 잡은 인물이 후안 페론(1895~1974)이었다. 그는 부인 에바와 함께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는 언동으로 대중을 결집하고, 국가가 불평등을 해결하겠다고 선언했다. 페론의 포퓰리즘은 단순한 인기영합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상실감에 대한 정치적 응답이었다. ‘피크아웃 코리아’ 국면에서 포퓰리즘 공약이 활개 치는 한국도 그와 다르지 않다.

누구 말처럼, 페로니즘이 서민을 위한다니까 진짜 서민을 위했다고 보면 오산이다. 페로니스트 정권은 부유층의 기득권도 인정해줬다. 연방 상속세와 증여세가 없다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아르헨티나에선 주 정부가 지방세로 상속세를 걷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경우 상속세율 최고 구간이 9.51%로 한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방대한 재정지출을 감당해야하는 페로니스트 정권은 법인세·소득세·부가세를 두루 무겁게 만들었다. 법인세 최고세율은 35%. 이게 적용되는 과세표준은 30만 달러 초과에 불과하다. 웬만한 중소기업은 죄다 최고세율이다. 한국은 과세소득 3000억원(약 2억1000만 달러)을 넘어야 최고세율 24%를 낸다. 소득세 최고세율은 35%인데, 이 역시 연 소득 약 6000달러만 넘으면 다 내야 한다. 부가세도 21%로 북유럽 국가와 맞먹는다.

세율을 높이면 세금이 많이 걷힐까. 천만의 말씀이다. 아르헨티나 최대 회계법인 리식키리트빈의 세자르 리트빈 대표는 “아르헨티나는 그동안 전형적인 ‘래퍼 곡선’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고 말한다.

세율이 어느 선을 넘어 높아질수록 세수는 되레 감소한다는 게 경제학자 아서 래퍼의 이론이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 감세정책의 이론적 근거였다. 래퍼 곡선의 세수 위축 효과가 아르헨티나를 괴롭혀온 것이다.

기업들은 법인세에다 약 5%의 지방세와 각종 준조세를 더 낸다. 이게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고, 전체 공급망의 효율을 떨어트린다.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아르헨티나 산업연합회(UIA)의 마르틴 라팔리니 회장은 이를 ‘아르헨티나 비용(Argentine cost)’이라고 부른다. 그는 “세금·규제 등 모든 문제가 응집된 결과 높은 가격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또 “우리 기업인은 그 체제의 생존자들”이라는 표현도 썼다.

무거운 세금을 다 내고, 까다로운 규제를 다 지키며 사업을 할 수 있을까. 누구나 피해가는 길을 찾기 마련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세금부담액이 기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국가별로 계산한 결과 아르헨티나는 106.3%에 달했다. 번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낸다는 뜻이다. 이게 100%를 초과하는 나라는 아프리카의 콩고와 코모로 정도다. 있을 수 없는 구조인데도 돌아가는 걸 보면, 세금을 제대로 안 걷고 안 내거나, 지하경제가 크게 형성돼 있다는 뜻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은퇴한 한인 사업가 고훈 씨의 얘기다.

“예전엔 세관에 돈을 집어주면 뭐든 수입할 수 있었다. 컨테이너에 무엇을 넣어 들여오든 통관서류엔 못을 수입한다고 신고했다고 한다. 그게 단가가 제일 싸니까. 그런 식의 밀수로 돈 번 사람들이 많다.”

생활 속의 세세한 규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물류회사 LK글로벌의 케빈 강 이사의 경험담이다.

“2023년 9월 캐나다의 친구가 생일 축하 엽서를 보내왔다. 그거 한장 받는데 세금만 20달러 냈다. 그마저도 받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 그게 당시 아르헨티나 상황이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사람들은 살아야 했다. 뭐가 어떻게 바뀌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다른 나라에선 몰라도 될 일들을 자세히 알아야 했다. 라플라타 시립 오케스트라 단원 구스타보 에이리즈는 요즘 살림이 어떠냐는 질문에 휴대폰을 꺼내 환율, 주가 차트를 펼쳐 보인다. 해외녹음으로 번 외화를 언제, 어떻게 들여오느냐를 놓고 애널리스트처럼 시장을 분석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거의 준경제학자다. 인플레가 심하고, 경제사정이 어지러워 나 같은 뮤지션도 경제지식이 많다. 상황에 맞게 다들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했다.”

포퓰리즘 체제에선 경제적 보상 구조도 사회주의를 따라간다. 미국에선 고소득이 보장되는 의사의 초임이 이곳에선 월 1000달러에 불과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사로 일하는 모니카 마르티네즈(55)는 “수많은 의사가 힘들게 일만 하다가 최저 연금으로 은퇴한다”고 말했다. 또 사립병원 영상의학과 의사 김 캐롤라인(31)은 “의사들이 보통 2~3개 병원에서 동시에 일한다. 한계를 느낀다”고 말한다. 그와 곧 결혼할 케미컬 엔지니어 이 우리엘(33)은 전공을 포기한 채 포스코 현지법인에서 월급 3500달러를 받고 통역사로 일한다. 그는 “의사, 엔지니어보다 통역사가 돈을 더 번다는 건 이상한 일 아닌가”라고 되물으며 “결혼 후 다른 나라로 갈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유능한 인재들의 선택은 나라를 떠나는 것이다. 라나시옹 등 현지 언론 분석에 따르면 2020년 9월부터 2022년 4월까지 약 30만 명의 전문직 인재가 해외로 유출됐다. 정착지는 주로 스페인·브라질·미국이었다. 애써 인재 키워 남의 나라 좋은 일 해주고 있다.

커나가야 할 기업은 발목 잡히고, 능력 있는 인재는 떠나고, 일해야 할 사람은 손 놓고… 100년 전 부잣집이었던 아르헨티나가 이런 지경이 됐다. 자유주의 경제이론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 하다 말이다.

□ 도움말 주신 분(무순)

기예르모 모레노 (원칙과가치 당대표)

마르틴 라팔리니 (산업연합회 회장)

세자르 리트빈 (회계법인 리식키 리트빈 대표)

에두아르도 헤커 (전 방코나시옹 행장)

마티아스 쿨파스 (전 산업부 장관)

릴리아나 프랑코 (부에노스아이레스헤럴드 칼럼니스트)

다리오 쿠신스키 (UNPAZ 총장)

실비나 카탈디 (UNPAZ 국제국장)

마리아노 토마시 (산안드레스대학 교수)

엘리오 델레 (금속산업협회 회장)

리안드로 모라 알폰신 (전 생산개발부 산업정책국장)

루시아노 볼리나가 (아우스트랄대학 아시아연구센터 소장)

알레한드로 젠타일 (테친그룹 디렉터)

바우티스타 부르디외 (킨토투자자문 애널리스트)

에르난 로메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출판사)

구스타보 에이리즈 (라플라타 시립 오케스트라 비올리스트)

마르티나 이바르 (케네디대학)

엘피나 로한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학생)

알레한드로 김 (변호사)

조애나 메사 알페르트 (콘덕토라 칼럼니스트)

이용수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

유정아 (주아르헨티나 한국대사관 참사관)

남선우 (코트라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장)

배성용 (부에노스아이레스 무역관 부관장)

최도선 (피바디 회장)

정유석 (중남미한상연합회 대표)

강태민 (LK글로벌 대표)

케빈 강 (LK글로벌 이사)

양수민 (강남익스프레스 대표)

김광복 (전 포스코 아르헨티나 법인장)

김미숙 (부에노스아이레스 한국문화원장)

정세훈(신성교회 목사)

고훈 (신성교회 장로)

박진성 (사업가)

조연미 (사업가)

황진이 (변호사)

이 우리엘 (포스코)

캐롤라인 김 (부에노스아이레스 병원 의사)

김소희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생)

부에노스아이레스=남윤호·장열 기자, 사진=김상진 기자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