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철학] 2월, 씨앗에 새기는 꿈

2025-02-20

올해 2월은 지난해보다 기온이 낮습니다. 아내가 지난해 이맘때는 완두콩을 파종했다며 입맛을 다십니다. 날씨가 안 도와주니 옆구리가 근질근질하다며 웃습니다. 완두도 완두이지만 날이 풀리고 밭이 푸슬푸슬 녹아 지난가을 뿌리지 못한 호밀이며 청보리도 파종하자면 여러 날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은 하루가 한 달 같아 안달이 납니다만, 지난해에 견줘 며칠 늦게 고추 씨앗 불림에 들어갑니다. 한 이틀이면 뿌리가 하얗게 움트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렇게 눈 뜬 씨앗을 포트에 뭉치로 옮겨 심어 일차로 싹을 틔우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며칠 내에 할 일입니다. “꼼짝없이 갇혀 지내시겠네.” 아내가 놀립니다. 그렇습니다. 싹튼 고추를 집어내 하나하나씩 집어내 다른 포트로 옮겨 심고 나면 4월 말이나 5월 초 정식할 때까지 밭에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됩니다. 올곧이 제 임무여서 아내가 저리 하는 말입니다.

씨앗, 어둠의 시간

모든 생물은 빛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씨앗의 발아는 흙 속에서 또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모든 생명의 태초는 어둠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 가끔 숙연해집니다. 어둠이 꼭 죽음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암흑 속의 적막과 고요야말로 탄생의 통과의례여서 생명의 묵직함 앞에 겸허해집니다.

아무튼 우리, 덤바우부부의 2월 농사는 토종 고추 모종내기로 시작합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품종이 조금 늘었습니다. 제게는 노랫말인 토종고추의 이름을 불러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비초, 긴영고, 칠성초, 앉은초, 사근초, 청룡초, 울릉초, 음성재래, 영천초, 노가리초, 한초, 금패황양각초, 흥덕고추, 육종고추(파주+화천재래) 등 모두 14종입니다.

아내가 고심 끝에 선정한 것들입니다. 탈락한 품종이 눈에 밟히는지 아내는 고르고 나서 아쉬움에 한숨을 쉽니다. “씨앗이야 재워두었다가 내년에 봐서 심으면 되지요.” 제 위안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두어 가지 더 넣을까?” 저는 단호히 말립니다. 종류와 양이 이미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 부부 깜냥에는 ‘재래종’이라 불러도 좋을 ‘정착한 개량종’ 또한 여러 종 보태야 하거든요. 이 또한 읊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칠리고추, 체리 빨강, 체리 노랑, 피터, 하바네로, 왕고추, 바나나파프리카, 수미향, 아라리, 안매운꽈리 등 모두 10가지군요.

토종 고추의 특성은 종에 따라 맛과 향, 크기에서 서로 비슷하기도 하고 확연히 구별되기도 합니다. 이 특성은 그러나 재배방식에 따라 강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거의 제 본성을 드러내지 못하기도 합니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제 기준이 하찮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미세한 차이와 같지 않은 반복을 되풀이하는 농사꾼에게는 소중합니다.

아내가 어둠에 고추 씨앗들을 가두며 한마디 합니다. “열려라 깨.” 그렇군요. 씨앗은 매우 단단합니다. 스스로를 보호하던 철갑옷을 안에서부터 열고 나오자면 감히 짐작하지 못할 엄청난 기운을 써야 하겠습니다. 그런 에너지가 저 조그마한 씨앗 안에 담겨 있다는 게 오히려 놀랍습니다.

토종, 존재의 이유

토종은 특정 지역에서 순계로 오랫동안 그 지방의 자연환경에 적응한, 그 지방 특유의 생물(種)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생종입니다. 순계는 영어로 pure line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순종, 순혈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 것 같습니다. 조금 넓은 의미에서 토종은 자생종뿐만 아니라 재래종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고정종자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쉽게 말해 씨앗으로 번식 가능한 종입니다.

문득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씨앗으로 번식이 불가능한 작물이 있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단적으로 말해 요즘 우리가 재배하는 많은 작물이 그런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른바 F1종자입니다.

F1종자는 ‘모계순계와 부계순계를 교잡하여 잡종 강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품종’을 말합니다. 이 종자의 특징은 ‘양친보다 생육이 왕성하고, 수량이 많고, 균일합니다. 또 개화와 성숙기가 촉진되며, 불량 환경에 대한 저항성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종자는 심각한 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F1종자는 재사용이 불가능합니다. F1종자에서 얻은 씨앗을 심으면 본래의 특성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불임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따라서 매년 새로운 종자를 구입해야 하므로 많은 비용이 발생합니다. 이는 농민의 종묘회사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 농민의 종자주권을 침해합니다. 결정적으로는 F1종자의 광범위한 사용으로 토종 종자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 농작물의 생물다양성이 극도로 편협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즘 무슨 유행처럼 ‘다양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나 F1종자에 의한 생물다양성 감소는 미래의 식량체계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선 양질의 F1종자를 얻자면 교잡에 필요한 많은 토종 종자가 존재해야만 합니다. 이는 대부분의 토종 종자의 보존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농업 생산에서 토종이 배제된다면 말 그대로 많은 토종 종자의 씨가 마르게 될 것입니다. 이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연구목적에 부합하는 실험을 통해 탄생하는 F1종자는 실용적 목적에서 배제된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환경이나 병해충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창하지만 우리가 최근 겪은 코로나 사태가 농작물 전반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수도 있겠습니다. 농작물의 다양성 확보는 미래 먹을거리를 위한 기본전략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토종은 특정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더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농약이나 비료를 덜 사용해도 잘 자라는 특성도 있습니다. 당연히 매년 씨앗을 구매할 필요 없이 재사용이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유전적 특성을 보존하여 생태계 균형에 이바지합니다. 덤으로 맛과 향, 그리고 풍부한 영양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희망의 씨앗

얼마 전 우리 부부는 ‘토종씨드림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토종을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단체입니다. 이 단체의 활동은 놀랍습니다. 말이 보존이지 토종을 당장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활동이 활발합니다. 전국 각지를 돌며 흩어져 있거나 명맥이 다해가는 토종을 수집하여 증식하고 보급할 뿐 아니라 관련된 교육을 통해 저변 확대를 꾀하고 있습니다. 토종 농가를 육성하여 활성화함으로써 소비자의 밥상에까지 토종이 범상하게 오르기를 꿈꾸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노력은 민간단체가 오로지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입니다. 다른 부문도 그렇겠지만, 토종의 사회 경제적 위상이나 법적 지위에 이르면 이러한 운동이 과연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2008년 4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귀농운동본부, 연두농장, 흙살림, 한국토종연구회, 환경농업연구회, 농어촌사회연구소 등 단체 대표와 개인이 ‘소멸되는 토종씨앗 보전’이라는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성한 비영리민간단체’로 출발하여 2025년 현재는 ‘전국적으로 45개가 넘는 지역 토종씨앗모임이 있으며, 전국귀농운동본부. 전국도시농업시민협의회,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경기도시농업시민협의회 등 귀농, 농민, 도시농업 단체를 비롯한’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운이 좋아 일찌감치 수비초라는 토종 고추를 알게 되어 토종 고추를 거의 20여 년 기르고 나누고 있습니다. 여러 해 드시는 분들이 한결같이 품질에 만족하는 것을 보며 신기하고 기쁩니다. 고추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농산물에 토종이 있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되살려 우리의 먹을거리로 누려야 할 토종이 흔해 빠질 정도로 많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근우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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