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의 의원직 제명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지난 27일 현재 59만명에 달한 것으로 보도됐다. 22대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한 진보당 손솔 의원은 “국회가 국민의 요청에 답해야 한다”며 “국회 윤리특별위원회가 하루빨리 구성돼 징계안이 논의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이준석이 지난 대선 때 보여준 충격적인 발언은 물리적 상해나 경제적 피해를 끼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욱 심각한 정신적, 정서적 학대에 가깝다. 따라서 이준석 ‘의원’을 일벌백계로 징계해야 온라인상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언어의 타락에 경종을 울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준석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댈 만한 정신적 거점 없는 사회
하지만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이 사회의 나쁜 문화를 거리낌 없이 따라 하는 것은 단순한 모방범죄가 아니라 범죄를 선동하는 일과 다름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터무니없는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하고 현재 내란죄 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윤석열의 경우를 보라.
선거 패자에게 여하한 책임을 묻는 일이 부담스러울 수는 있다. 하지만 이준석의 경우는, 다시 윤석열의 예처럼, 승자가 패자 주머니를 뒤져서 찾아낸 옷핀을 흉기로 둔갑시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먼저 책임을 묻는 주체가 주권자라는 것이 다르고, 다음으로 문제의 발언이 공동체의 내면에 심각한 상처를 줬다는 점에서 다르며,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는 선거라는 이벤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 훼손 언행에 대해서는 시효 없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 혹자들은 민주주의가 아무 말과 행동을 해도 보호해주는 제도라고 우기겠지만, 정치 제도가 됐든 경제 정책이 됐든 “모든 국가(polis)는 분명 일종의 공동체이며, 모든 공동체는 어떤 좋음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아리스토텔레스)되는 것이기에 ‘좋음’을 훼방·훼손하는 언행을 금지하는 일은 당연하다. 민주주의라는 것도 국가 공동체가 좋음을 실현하기 위한 적합한 정치체일 뿐 분별없고 해로운 ‘짓’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이준석 본인이 잘못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에서 이준석을 선택한 일부 젊은 세대를 향해 일부 기성세대가 장탄식을 하는 이유도 이준석으로 상징되는 경악할 만한 현상이 우리 사회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표를 던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여러 분석과 그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들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 믿고 의지할 정신적 거점이 없다는 데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매사를 경제적 어려움과 빈부 격차의 문제로만 환원시키는 것도 일면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기성세대가 성찰하고 반성해야
근대 자본주의가 야기한 생태계 파괴로 인한 기후위기와 시쳇말로 돈 놓고 돈 먹는 신자유주의 카지노 경제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의 무게가 피아를 식별하지 못하게 하는 울분으로 내몰았다. 거기에 정서적 안정감과 경험의 두께를 더해주는 자연도, 당장의 생존을 떠받쳐줄 사회적, 경제적 제도도 보이지 않는 형국에서 뜨거운 생명력이 파괴적인 경향을 띠는 현상은 비교적 흔한 일이다. 그 생명력이 건강하게 발현될 수 있는 장을 만들지 못한 것은 기성세대의 책임이지만 문제의 원인을 경제적 문제로만 국한시키는 것도 사람을 경제적 존재로만 한정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경제란 것은 좋을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는 법인데 이것은 단순히 자본주의 경제 사이클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격랑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폐사한 물고기 떼를 보면서 수질이 상당히 나빠졌거나 수온이 급격하게 높아져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불찰을 반성하곤 한다. 그런데 물고기가 물에 살 듯 인간도 예를 들면 공기라는 거대한 수조 안에 살고 있다는 자신의 실존 상태를 돌아보지는 않는 것 같다. 이는 인간도 폐사한 물고기 떼와 같은 운명일지 모른다는 파국에 대한 단순한 유비가 아니라, 인간은 인간끼리뿐 아니라 동물이나 나무들과도 그리고 흐르는 저 강물과도 무언가를 통해 이어져 있으며 그 무언가를 공평하게 나누어 가진 상태에서 기대어 살고 있음을 가르쳐준다. 그래서 그것들과 존재적으로 평등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즉 살아 있는 것들은 꼭 부족함과 결핍 때문만이 아니라 기대어 살게 하는 공통적인 ‘무엇’ 안에서 그것을 통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 진리는, 우리 같은 기성세대가 다 폐기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젊은 세대가 이준석 같은 퇴행적 문화에 힘든 마음을 얹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준석의 제명 문제는 바로 기성세대의 반성과 성찰의 문제로도 이어지는 일이며, 우리가 기대어 살 존재는 결코 이준석 ‘현상’이 아님을 확인하는 ‘큰 정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