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헌법 제20조는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정교분리 원칙을 규정한다. 이 조항은 1948년 제헌헌법 당시부터 있던 역사를 가진 조항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정교유착으로 폐해를 겪은 유럽사회가 이에 대한 반성으로 정교분리 원칙을 세운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48년 헌법 제정 당시 국회의원들은 정교분리 조항을 언제든 삭제할 수 있는 막연한 선언에 불과한 것으로 봤다.
시작부터 이러다 보니 이후 정치 현실에서도 종교와 정치의 엄격한 분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보수개신교는 군부독재 이후 반공을 내세워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유신정권 지지와 후원으로 혜택을 받아내기도 했다. 나아가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여러 정치적 현안을 내세운 집회 등을 하며 정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왔다. 그 과정에서 정교분리 원칙은 정부의 교회 간섭을 막기 위한 것일 뿐 교회의 정치 참여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모순적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종교와 엄격히 분리하지 못한 것은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1966년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조찬기도회가 처음 개최되었고, 이후 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50년의 시간 동안 정권은 계속 바뀌었음에도 역대 대통령 모두가 기도회에 참석해왔다. 여야를 막론하고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대형 교회 목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의 실종은 광장에 선 시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낸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인사청문회를 마친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가 2023년 개신교 단체 모임에 참석하여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며 “모든 사람이 동성애를 선택한다면 인류가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고 말한 사실이 보도되었다. 김 후보자는 최근에도 외신 기자회견에서 “종교적 신념에 기초해 차별금지법 비판 시 처벌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면서 이를 본질적·헌법적 목소리라 칭하였다.
김 후보자의 이러한 주장은 애초에 사실과도 다른 허구의 이야기다. 동성애와 같은 성적지향은 개인의 내밀한 인격적 정체성으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동성애자는 늘어나지 않고 단지 감추고 살던 이들이 더 용기를 낼 수 있게 될 뿐이다. 또한 지금까지 국회에 발의된 어떠한 차별금지법도 이를 비판만 한다고 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국무총리 후보자가 허구의 사실에 기초해 보수개신교의 왜곡된 차별금지법 반대 주장을 차별받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절박한 목소리와 동등한 헌법적 목소리라 포장해버린 것이다. 김 후보자가 특정 종교 내, 그것도 그 안의 일부 교회의 주장을 들어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한 것은 보수개신교의 신념에 의해 정치가 얼마나 왜곡되어왔는지를 보여준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왕은 없다’. 왕처럼 군림하는 종교적 신념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군림하고 전부를 통제하는 국교 없이, 다양한 종교와 신념이 경합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좀 더 평등하고 안전한 서로가 되는 사회가 바로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지난 23일 한국성소수자연구회,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한국성소수자/퀴어연구학회는 위와 같은 성명을 내며 국회가 김 후보자의 발언을 검증할 것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이틀간 이루어진 인사청문회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질문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민주국가는 특정 종교적 신념이 아닌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헌법적 가치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 이른바 ‘빛의 혁명’ 이후 탄생한 정부는 이 당연한 원칙을 이제는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이제라도 80여년의 헌정사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정교분리 원칙의 의미가 확립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