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은 일단 중안부가 기세요.”
성형외과, 미용실, 메이크업 유튜브 및 릴스 등에서 끊임없이 중안부가 언급된다. 눈썹에서 코끝, 넓게는 입술까지의 거리를 의미하는 ‘중안부’가 현재 국내 외모 정병(‘외모 정신병’의 줄임말)을 장악했다. 자고로 중안부가 짧아야 어려 보이고 예쁘다는 것이다. 미용 산업은 여성의 몸을 조각조각 내서 이름 붙이고 품평하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신체를 문제화한다. 그리고 교정과 보완에 시간과 자원을 쏟도록 한다. 중안부는 ‘승마살’이나 ‘힙딥’처럼 이 산업이 발견한 또 다른 개척지이다. 연예인을 예로 드는 ‘얼평’(얼굴 평가)의 잣대는 당연하게도 이를 보고 듣는 개인에게 되돌아온다. 예뻐서 연예인이 된 연예인조차 중안부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누군들 충분하겠는가. 중안부가 길면 머리를 이렇게, 메이크업은 이렇게, 사진 보정은 이렇게 해야…… 일종의 자조 개그로도 쓰이며 맹위를 떨치는 중안부 정병은 ‘더 나은 모습’을 추구해야 한다는 외모 강박, 그 유구한 계보의 최신 버전이다. 그래서 2024년 12월 개봉해 독립영화계 흥행 1위를 지키고 있는 영화 <서브스턴스>(2024)의 질문은 낯설지 않다. “더 나은 나를 꿈꿔본 적이 있는가?”
<서브스턴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한때 오스카상까지 수상한 스타였으나, 지금은 TV 에어로빅쇼 진행이 유일한 일거리다. 그마저 50세가 되던 해 생일, “어리고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해고된다. 차 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간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권유받는다. “더 나은 나를 꿈꿔본 적이 있는가? 더 어리고, 아름답고, 완벽한 나.” 단 한 방의 주사로 젊고 아름다운 ‘나’로 일주일, ‘원래의 나’로 일주일을 살 수 있다는 유혹은 허무맹랑하면서도 강렬하다. 주사를 맞자, 젊고 아름다운 여성 ‘수’(마거릿 퀄리)가 엘리자베스의 육체를 찢고 나온다. 수로 존재하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껍질로만 존재하며, 수는 하루에 한 번씩 엘리자베스에게서 추출한 골수를 안정제로 맞아야 한다. 일주일이 지나면 교대해야 하고,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이 규칙이다.
수는 에어로빅쇼의 새로운 진행자를 뽑는 오디션에 지원해 순식간에 스타로 떠오른다. 화려한 일주일을 보낸 수는 엘리자베스로 돌아와서는 종일 TV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수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거부감을 느끼고, 젊은 상태를 더 오래 유지하고자 규칙을 어긴다. 수가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기간만큼 엘리자베스의 노화가 가속화된다. 화가 난 엘리자베스는 폭식을 하는 것으로 수에게 타격을 가한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를 ‘그 여자’와 ‘걔’로 부르며 갈등하지만, 고객센터(?)는 “두 사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말만 반복한다. 수의 욕망은 결국 엘리자베스의 욕망인 것이다. 그것은 법적 성별 여성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가 자기혐오와 끈끈하게 뒤엉킨 채 학습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아프고, 괴롭고, 심지어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해치는 선택일지라도 좀 더 예쁘고, 더 나은 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할 것. 그래야만 자기 관리라는 현대인의 윤리(Ethic)를 획득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와 수가 에어로빅쇼가 끝난 후 자신을 돌보고 아끼라고 하는 인사처럼.
50살 엘리자베스, 약물 주입해
아름다운 20대 수로 신체 분열
종래엔 괴물이 돼 정상성 이탈
외모 집착은 어리석음 탓 아냐
사회 구조와 연루돼 욕망 주조
‘서브스턴스’같은 괴물 더 필요
동정·비판 넘어선 교훈 찾아야
여기서부터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한다. <서브스턴스>의 문제의식과 연출은 직관적이다. 엘리자베스는 성차별, 노화로 인해 겪는 고령자차별(에이지즘)에 노출되며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시선은 남성적이고 폭력적이다. 이는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데미 무어가 가장 아름다운 배우이자, 섹스 심벌로 통했던 현실과 포개지며 절묘한 효과를 낸다. 카메라 뒤에는 언제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남성들이 있고, 이들은 여성의 나이가 50세가 넘으면 끝난다고 말하거나 신체를 클로즈업한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돌려본다. 수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사랑, 엘리자베스가 당하는 차별과 무시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 폭력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고통받는다. 가장 가혹하고 거부하기 힘든 폭력의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진실은 목을 조른다. 수와 괴리감을 느끼던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라고 부르는 동창과 데이트하려고 한껏 멋을 낼 때 조금은 기대했다. 그래, 아름다움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고 친밀하고 고유한 관계가 외모 정병을 치유할 거야! 그러나 수와 자신을 비교하며 거울 앞에서 몇번이고 화장을 고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엘리자베스는 결국 자신의 얼굴을 미친 듯이 때리며 무너진다. 아, 너는 충분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이 나 자신일 때, 타인은 모르는 단점까지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해 일일이 거슬릴 때, 그 생각을 하게 만든 여러 조건들은 쏙 빠지고 오롯이 ‘성에 안 차는 현실의 나’와 ‘도달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미치도록 손에 안 잡히는 더 나은 나’만 남아서 지금부터 서로 죽이라는 지령만 귀에 웅웅거릴 때… 피를 뒤집어쓰고 발길질하는 수의 모습은 영화 속 허구가 아니다.
조금은 뻔한 <서브스턴스>의 메시지는 보디 호러(Body horror)라는 장르적 특징과 결합한다. 보디 호러는 인간이나 다른 생물의 신체에 의도적이고 기괴한 변형을 가해, 심리적인 불편함을 유발한다. 신체 절단이나 좀비화, 돌연변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나 외형을 포함하기에 보디 호러의 공포는 정상성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다. 무언가 ‘비정상’이라는 감각 없이 보디 호러는 성립하지 않는다. 스크린에서는 ‘건강하고 탱탱한’ 젊은 여성의 육체와, 고칼로리의 음식이 미끈한 수의 몸 어딘가에서 불거져 나오는 상상, 젊음을 빼앗긴 여성 노인의 구부러지고 쭈그러든 육체가 충돌한다. 욕망의 끝에서 파국에 이르는 엘리자베스 또는 수는 괴물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존재로 거듭난다.
이 괴물은 아름다운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이 ‘정상적’인 규범에 따라 배치되지 않았을 뿐이다. 괴물은 아름다움의 이데올로기에 흠집을 낸다. 성형수술 퍼포먼스로 유명한 프랑스의 행위예술가 오를랑은 명화 속 여성 인물의 신체를 조금씩 따왔다. 예를 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이마,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턱 등을 조합한 얼굴을 성형수술로 구현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관념적인 미인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의도적으로 기괴하다. 오를랑의 퍼포먼스는 서구 남성 중심적이고 표준화된 미적 체계를 붕괴시키고, 성형수술을 페미니스트 도구로 전유해 새로운 미적 양상을 구현했다고 해석된다. <서브스턴스>의 괴물이 자신의 몸을 휘두르며 폭주하는 장면은 끔찍하지만,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 지점에서 한국 관객은 오랫동안 멸칭으로 쓰여온 ‘성형 괴물’이라는 말을 떠올릴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인 성형과 괴물이라는 단어가 결합한 모순은 ‘적당히’ 멈출 줄 몰라 기어이 부자연스러운 외모를 가지게 된 어리석은 여성들을 조롱하고 싶은 욕망과 정상성의 환상을 반영한다.
외모지상주의와 에이지즘이 옳지 않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살 속에, 노화 속에, 꾸미지 않음 속에 파묻혀 있는 더 나은 나, 아니 ‘진짜 나’를 구출해야 한다는 압박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니 외모가 여성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력의 수단이 아닌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 외에, 다른 차원의 논의 또한 필요하다. <서브스턴스>와 함께 읽으면 풍성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책 두 권을 추천하는 것으로 진부해질 결론을 슬쩍 피해가고자 한다. 김지효 작가의 <인생샷 뒤의 여자들>(오월의 봄, 2023)은 ‘인생샷’, 즉 셀카 문화를 분석해 아름다움에 내재한 여성 청년들의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맥락을 분석한다.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여성을 어리석은 존재로 폄하하지 않고, 그 욕망이 어떻게 주조되고 사회 구조와 연루되는지 살피는 접근이 돋보인다. 셀카와 보정 또한 ‘더 나은 나’를 추구하는 실천으로서, 디지털 서브스턴스라고 할 수 있겠다. 과학기술학 연구자인 저자가 성형외과에서 참여 관찰을 하고 쓴 <나는 어떻게 성형미인이 되었나>(임소연, 돌베개, 2022)는 아름다움과 신체 변형(성형)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촉구한다. “실패한 몸을 동정하거나 조롱하고 성공한 몸을 찬양하거나 질투하는 이분법 아래에서 몸은 둘 중 하나에 속하여 과대 재현되거나, 둘 중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침묵하게 된다. 이것은 이 이분법을 깨는 이야기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하는 이유이고, 더 다양하고 많은 ‘괴물’을 더 자주 만나야 하는 이유다.”(207쪽) <서브스턴스>의 감상은 괴물이 된 여성을 동정하거나, 괴물을 만든 사회를 비판하거나,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외모 정병을 벗어나야 한다는 교훈을 넘어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