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고 20만원뿐" 30대 ADHD 무직자, 나뭇잎이 그를 살렸다

2024-11-16

0.05㎜ 펜으로 밑그림을 그린 뒤 칼로 나뭇잎에 정교하게 조각하는 '리프 아트(Leaf Art)'에 일본이 열광하고 있다. 잎사귀에는 대입 수험생의 합격을 기원하는 응원 메시지도, 인기 만화 주인공 도라에몽도 등장한다. 손바닥보다 작은 잎에 토끼·개구리·도마뱀 등을 새기는 '금손'의 주인공은 하시모토 겐지(38·橋本賢治)다.

그는 올해 6월 일본 후쿠시마(福島)에 세계 최초로 나뭇잎 미술관을 열어 주목받기도 했다. 중앙일보가 국내 언론에서는 처음으로 하시모토 작가(활동명 리토)를 지난달 말 e메일로 인터뷰했다.

6년 전만 해도 그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 장애(ADHD) 진단을 받은 30대 무직자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스시집·골판지 공장·화과자 가게 등에서 일했지만 일머리가 없다고 직장 선배들에게 꾸중듣기 일쑤였다.

손님 맞이를 하거나 상사의 지시를 이행하는 일이 어려웠다. 매장 내 물건 위치가 조금만 바뀌어도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일에 몰두하면 이번엔 일처리가 너무 느리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런 자신이 답답했던 그는 병원에서 ADHD 진단을 받고서야 그간 직장에서 부적응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ADHD 증상 때문에 몇 개월 못 가 직장에서 해고되는 나날이었다. 마지막 일자리를 잃은 직후엔 통장에 2만엔(약 20만원)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때 한 스페인 작가의 나뭇잎 아트를 보고 '이거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돈이 없어도 잎사귀는 어딘가에서 공짜로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시작했다"고 전했다.

처음엔 나뭇잎에 원하는 그림을 새겨 넣는데 하루가 걸릴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요령이 생겨 속도가 붙었다. ADHD의 특징인 '한 가지에 과도할 정도로 집중한다'는 점이 작업에 큰 도움이 됐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작업용 잎사귀 재고를 챙기는 일이라고 한다. 집에 최소 100장 이상 잎사귀를 확보해 작업한다. 근처 공원에서 잎을 구해와 글리세린과 물을 섞은 용액에 담가서 가공한 뒤 쓰는 것이 그만의 방식이다.

매일 아침 작업을 시작해 완성됐을 때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는 게 일과다. 하늘과 나뭇잎 등 자연까지 담아 내기 때문에 그의 사진 속에는 계절감이 살아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하루 한 작품 꼴로 공개하는 나뭇잎 아트 팬이 늘면서 SNS 팔로워도 59만명이 됐다.

나뭇잎 예술은 그에게 밥 먹여주는 직장이다. 정교한 솜씨로 새긴 작품 한 점에 30만엔(약 273만원)을 받고 판 적도 있다. 매년 나뭇잎 작품이 들어간 달력을 만드는데 올해까지 누적 30만부가 팔렸다. 2021년부터 일본 내에서 70회 넘게 전시회를 열었다.

작품을 보러온 관객들과 소통하고, 따뜻한 관람평을 듣다보면 그는 비로소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마음둘 곳이 없는 사람이라도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장소를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ADHD가 있어도, '보통'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늘 혼나기만 하다 보니 화도 많이 났고 막막한 삶이었다"면서 "하지만 ADHD 증상을 받아들이고 나뭇잎 아트를 하면서 그동안 단점이었던 게 오히려 장점이 됐다"고 했다. "약점을 날카롭게 벼리면 언젠가 자신만의 강점이 된다"는 지론을 밀어 부친 덕분이다.

그는 "ADHD가 있는 사람들도 너무 자책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저의 작품이 ADHD를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도 했다.

아직 해외 전시회를 연 적이 없는 그는 "한국에도 나뭇잎 아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한다"면서 "조만간 한국에서도 전시회를 열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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