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세계대회 48번 제패…바둑사 길이 남을 ‘4인방의 전설’

2024-11-05

한국 바둑에 이른바 ‘4인방’이라 불리는 영웅들이 있었다. 누구나 잘 아는 이름,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가 그들이다. 4명의 천재 기사들은 한국 바둑의 가장 찬란한 시절을 만들어냈고 힘을 모아 세계 바둑을 정복했다. 세대가 다른 이들이 어떻게 ‘4인방’이란 하나의 이름으로 묶일 수 있었을까.

조훈현 9단과 서봉수 9단은 1953년생 동갑내기고 유창혁 9단은 1966년생이다. 4인방 중 가장 어린 이창호 9단은 1975년생이니 무려 22년 차이가 난다. 더구나 이창호는 조훈현과 사제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4명은 한 시대에 정상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바둑의 일인자가 통상 10년 주기로 바뀐다는 점을 감안하면 4인방 시대는 진정 특이한 케이스가 아닐 수 없다.

일례로 삼성화재배를 들 수 있다. 1997년 우승자는 이창호, 2000년 우승자는 유창혁, 2002년 우승자는 조훈현이다. 응씨배에선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 순으로 우승해 순서(?)를 지켰지만 삼성화재배는 역순이 나왔다. 조훈현은 당시 49세 10개월이란 최고령 기록으로 삼성화재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서봉수가 국가대항전인 진로배에서 9연승 신화를 쓰며 우승한 것도 42세 때다.

이창호는 다소 일찍 정상권에 진입하고 조훈현과 서봉수는 나이를 초월해 버티면서 ‘4인방’이 동시대에 활약하는 진기한 장면이 만들어졌다. 조훈현은 9세, 이창호는 11세에 입단했지만 서봉수와 유창혁은 18세에야 프로가 됐다. 서봉수는 바둑을 늦게 배웠고(고등학교 때도 아마추어 선수였다) 유창혁은 소년 시절 가정 사정으로 몇 년간 바둑과 떨어져 있었다.

조훈현은 세계대회 12회, 국내대회는 149회 우승했다. 서봉수는 세계대회 3회, 국내대회 29회, 유창혁은 세계대회 10회, 국내 20회, 이창호는 세계대회 23회, 국내 118회 정상에 올랐다. 이들 4인방의 우승 이력을 합치면 세계대회 기준 48회, 국내대회는 무려 316회에 이른다. 엄청난 업적이다. 조훈현과 이창호가 워낙 막강해 서봉수와 유창혁이 상대적으로 가리워진 감이 있지만, 그들 역시 다른 시대라면 충분히 일인자가 되고도 남을 재능의 소유자들이다.

기실 ‘사인방(四人幇)’은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가 아니다.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 마오쩌둥 주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4명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자주 사용하다 보니 ‘4인방’이란 표현이 익숙해졌고, 누군가 바둑의 최강자 4명을 묶어 ‘4인방’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중국에선 4인방이라는 표현의 부정적 어감 때문인지 ‘사천왕’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그러나 한국에선 여전히 4인방이란 칭호가 통용된다.

4인방의 전성기 이후 바둑계는 이창호 9단에서 이세돌 9단, 박정환 9단, 신진서 9단으로 일인자 자리를 대물림했다. 이창호가 1975년생, 이세돌이 1983년생, 박정환이 1993년생, 그리고 신진서는 2000년생이다. 7~10년 차이로 바둑의 한 시대가 바뀐 셈이다. 하지만 4인방 시대엔 세대를 뛰어넘어 4명이 함께 한국 바둑을 이끌었다. 세 명이 져도 나머지 한 사람이 우승하며 세계 무대에서 무적 시대를 구가했다.

4인방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기록을 남겼다. 우승 횟수와 승수 모두 압도적이다. 조훈현 1963승, 서봉수 1795승, 유창혁 1419승, 이창호 1912승이다. 도합 7089승을 거뒀다.

조훈현 9단은 이제 더 이상 공식 대회에 출전하지 않는다. 초청 받는 한두 대회만 나가는 정도다.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는 시니어+여성 대회인 레전드 리그에서 활약 중이다. 이창호 팀이 현재 정규 시즌 1위다. 요즘 오전에 바둑TV를 틀면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광은 흘러갔다.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플 때도 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4인방과 그들이 주도한 시대는 바둑사의 불가사의이자 전설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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