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열씨의 아내 박필순(76)씨가 40년 자수 경력을 결산하는 개인전을 열고 있다. 한국화가 월전(月田) 장우성 선생을 기리는 월전미술문화재단 초대전 형식으로 지난달 하순부터 이달 25일까지 서울 삼청로 한벽원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에 '어머니의 마음으로'라는 제목을 붙였다. 자녀는 물론 집안의 건강과 번영, 나아가 세상의 안전과 평화를 기원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담았다는 뜻이다.
2006년 자수 개인전을 연 적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박씨를 '이문열의 아내'로만 알기 십상이다. 근거지 부악문원을 철철이 수놓는 꽃들만큼이나 화사한 미소의 주인공이거나 1980~90년대 문단의 짓궂은 주당들을 푸근하게 감쌌던 안주인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드러내지 않았던 탓도 크다. 이문열씨의 제자 소설가 엄창석씨가 지난달 20일 전시 오프닝 사회를 보면서 "한밤에 내리는 눈처럼 소리 없이 작업을 하셔서 2000년대 중반까지 사모님이 자수를 하신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고 소개했을 정도다.
1949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박씨는 84년 고행자 선생에게 배우며 자수를 시작했다. 98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등에서 입상했고, 2015년 한국-헝가리 수교 25주년 기념 전시회에 참가했다. 아시아 미술에 주목하는 미국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에서 2008~2009년 장기 전시했을 때는 박씨 작품에 매료된 박물관 측이 전통 혼례복인 활옷의 소장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두 번째인 이번 개인전에는 첫 개인전 전시 작품들에, 347✕184㎝ 크기의 10폭 병풍 '서수도(瑞獸圖)' 등 신작을 일부 추가해 모두 43점을 내놓았다. 병풍 같은 대작 이외에 보석함과 이층장, 신부 꽃신에 각종 노리개까지, 과거 자수가 우리 일상생활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활용됐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전시 구성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박씨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새벽까지 원고 작업하는 남편 곁을 지키다 자수를 하게 된 게 아니다"라고 했다. 결혼생활이 안정되자 가족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다. 자수는 밖에 자주 나가지 않고도 가끔 선생님의 지도만 받으면 시어머니 모시는 집안 환경에서도 할 수 있었다.
박씨가 자수 수판 앞에 앉는 시간은 남편 저녁을 차려주는 등 모든 일과가 끝나는 밤 9~10시 사이. 나중에는 체형이 구부정하게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을 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바늘이 천을 100만 번 뚫어야 하는 자수의 단순 반복이 주는 묘한 매력에 빠져 새벽 서너 시까지 6, 7시간 작업하기 일쑤라고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를 놓다 약속 시각을 넘겨 낭패를 본 경우도 적지 않다.
박씨는 "내 자수 작업은 명인이나 장인 대접을 받는 분들의 발끝도 못 따라간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정해진 틀에 얽매이기는 싫다"고 했다.
자수는 과거 자투리 천 조각을 이어 붙여 가령 설빔을 만들어야 할 형편일 때 성한 옷보다 더 예쁘게 옷을 꾸미는 방편이었다. 박씨는 "마음이 울적할 때 어린 시절 손수건이나 옷에 수놓아졌던 꽃이나 들풀을 길가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지금 나보다 훨씬 젊으셨던 어머니의 기억, 어렴풋하지만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와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요즘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과 잠자리나 매미를 함께 수놓는다면 잠자리 같은 곤충이나 옆의 또래 친구와 쉽게 친해지는 건 물론 엄마와 대화하며 지혜롭고 총명하게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기회가 닿는다면 엄마와 아이들이 함께 하는 자수교실을 언젠가 열고 싶다는 꿈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박씨는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동안 내가 크고 작은 문제에 맞닥뜨릴 때마다 남편이 얼마나 큰 도움을 줬었는지 새삼스레 깨닫는다. 자수 작업도 크게 지지해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