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봉황알 고분’은 1524년전 정변의 기록…5살 왕자, 이사지왕은 누구?

2024-12-30

경주에서는 예부터 ‘봉황 알’ 전설이 구전되었다. 즉 누란의 위기에 선 10세기초였다.

풍수가가 고려 태조(918~943)에게 “배 모양으로 생긴 경주는 언젠가 좋은 바람을 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침몰시켜야 한다”고 꼬드겼다. 풍수가는 이번에는 신라 임금을 찾아가 세치혀를 놀렸다.

“봉황의 둥우리처럼 생긴 서울(경주)는 천년 동안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젠 봉황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합니다. 서울에 봉황의 알을 많이 만들어 두면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할 겁니다.”

풍수가의 말에 혹한 신라 왕은 경주 한 복판에 둥글둥글 흙을 쌓아 산더미 같은 알을 수없이 만들었다. 그런 뒤 미추왕릉 부근의 숲속에 우물을 파놓고 고려로 도망갔다. 짐을 잔뜩 실은 배의 밑 바닥을 뚫어 놓은 격이었다. 이 때문에 ‘신라’라는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신라의 전설집>·경주시·1980)

■봉황알 전망대

두가지 착안점이 있다. 형산강(서천)과 북천(알천), 남천으로 둘러싸인 경주 분지는 선상지(삼각주) 지형이다.

곳곳에서 용천수가 솟아나온다. ‘배의 형상’이라는 구전에 걸맞은 ‘물의 도시’라 할 수 있다.

또 도성 안팎으로 수많은 고분이 조성되어 있다. 1915년부터 일제가 고적조사사업을 벌이면서 일련번호를 붙인 고분만 155기에 이른다. 돌무지덧널무덤이 절대 다수다. 그러나 이 고분들이 신라 왕릉급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봉황 알’ 운운하면서 갖가지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으뜸인 ‘봉황 알’이 있다. 대릉원의 외곽인 노동동에 자리잡고 있는 ‘봉황대’이다. ‘봉황대’는 경주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단독분이다. 봉분의 높이 21.4m에, 지름 82.3m에 달한다.

현재도 봉분 위에는 수백년이 족히 되었을 느티나무 등 나무 9그루가 자라고 있다. 지금은 고분 티가 나지만 일제강점기의 사진을 보면 봉분 위에 헝클어진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구릉의 형상이다. 그래서 ‘봉황대(봉황알처럼 생긴 전망대)로만 알려져왔다.

그래서일까. 봉황대는 경주를 유람하는 문사나 일본을 오가는 사절단이 올라 경주 시내를 조망하는 ‘핫플’이었다.

“봉황대는 산을 인력으로 만들어 전망대를 세운 것이다…그리 높지 않지만…월성·첨성대·금장대·김유신묘가 모두 한 눈에 바라보이니….”(김세렴의 <해사록>·1636년 9월3일)

■금관·금방울·금동신발 고분

조선후기 들어 ‘봉황대’가 왕릉급 무덤이라는 인식이 들기 시작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고고학적 안목을 발휘한다.

“…봉황대 동서편에 인공산이 많다…몇 해 전 무너진 인공산에서 깊이가 한 길 남짓 되는 검푸른 빛의 공동(구멍)이 보였다.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인공산’이 옛날의 왕릉이라는 증거가 된다.”(<완당전집>)

봉황대(125호)와 130호, 134호 등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고분이 딸려 있는 형상을 가리킨 것이다.

그중 으뜸인 봉황대가 거느리는 식구는 금관총(128호)·금령총(127호)·식리총(126호) 등이다.

이 중 첫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고분은 1921년 주막집 증축 터파기 공사 도중 우연히 노출된 금관총이었다.

이곳에서 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관모, 귀고리, 허리띠 등 온갖 황금제품이 쏟아져나왔다.

황금유물에 재미를 본 일제는 봉황대에 딸린 두 기의 고분을 정식발굴한다. 3년 뒤(1924) 126호분 및 127호분 발굴이었다.

그중 ‘금동장식신발(금동식리·金銅飾履)’이 나온 126호분은 ‘식리총’이라 했다. 금령총의 발굴성과는 금관총 못지 않았다.

금관을 비롯해 귀고리·허리띠·목걸이·팔찌 등 순금제 장신구가 보였다. 말탄 인물상(기마인물형 도기) 2점과 함께 금방울(금령)이 출토됐다. 출토 유물을 검토한 결과 ‘금령총 주인공=6세 이하의 왕자’로 판단됐다. 유물이 한결같이 ‘아담사이즈’지만, 질과 양 측면에서 금관총에 절대 뒤지지 않는 최상급이다.

■‘이사지왕’의 출현

그렇다면 일제강점기나 해방 이후를 막론하고 왜 ‘딸린 고분’만 조사했을까. 가장 큰 봉황대만 파면 ‘게임끝’이 아닌가.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1500년 이상 도굴없이 버텨온 신라왕의 무덤을 파헤칠 수 없는 일이다. ‘고고학 발굴’이 곧 ‘유적 파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높이 21.4m, 지름 82.3m나 되는 고분의 발굴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결국 국립경주박물관은 일제 강점기에 조사된 금관총(2015)과 금령총(2018~2020) 등을 재발굴함으로써 그 갈증을 풀었다.

그런데 재발굴 결과가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또 다른 수수께끼를 받은 셈이 됐다.

우선 금관총 재발굴에서는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의 ‘칼끝장식’ 1점이 나왔다. 2013년에도 금관총 유물의 보존처리 도중 ‘이사지왕’ 명문 고리자루큰칼 2점을 확인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금관총에서만 출토된 3점의 ‘이사지왕’ 명문 칼은 대체 무엇일까. ‘금관총의 주인공=이사지왕’이라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삼국사기> 등 사료에서는 ‘이사지왕’이 보이지 않는다.

■억지로 끼워넣은 금령총

2018년부터 시작된 금령총 재발굴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봉황대와 금령총 사이에서 금령총보다 먼저 두 기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었다. 발굴단은 두 고분에 127-1호, 127-2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끼워 넣었기에 금령총을 지름 30m 가량의 중형 고분으로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왜 봉황대와 127-1, -2호 사이에 뒤늦게 금령총을 굳이 입주시켰을까.

상식적인 추론은 가능하다. 즉 신라왕(봉황대의 주인공)의 어린 왕자가 예기치못한 죽음을 당한다. 그러자 슬픔에 젖은 신라왕이 최고의 예우를 갖춰 장례를 지내줬다. 기존에 조성된 127-1, -2호에 앞서 끼워넣어…. 그래도 갈증은 해결되지 않는다.

봉황대-금관총-금령총-식리총의 관계도 규명하기 벅찬데, 127-1, -2호 등 정체불명의 고분 2기까지 추가되었다니…. 재발굴로 인해 ‘혹 떼려다 외려 혹 붙인 격’이 아닌가 하는 우스갯소리가 나올법 하다.

■500+α

얼마전 경주에서 열린 금령총 발굴 1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서 봉황대·금령총·금관총의 주인공을 밝히려는 ‘용감한 시도’가 있었다. 그것도 국가기관이어서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밖에 없었던 국립경주박물관 연구자들이 나섰다.

박물관 연구자들은 일단 금령총의 조성연대를 6세기초, 그것도 500년에 아주 가까운 시점으로 좁혀놓았다.

왜냐. 금령총에 5세기말~6세기초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도기의 경우 무덤 내부에서는 6세기 1/4분기(500~525) 제작품이 보이지만, 무덤 조성 후 둘레돌(호석) 제사를 올린 뒤 돌려 묻은 항아리 내부에서는 5세기 4/4분기(475~500) 제작품도 출토되었다.

특히 3세트가 확인된 말갖춤새가 눈길을 끈다. 말갖춤새에는 5세기 4/4분기에 제작된 것, 주인공인 유아의 장례 껴묻이용으로 새롭게 만든 세트(6세기 1/4분기 제작품)가 섞여있었다. 새롭게 제작된 말갖춤새를 무덤에 껴묻이(부장)했다면 제작-껴묻이 사이의 시간 폭이 좁았을 것이다.

무덤이 6세기 극 초, 즉 서기 500년에서 매우 가까운 시점에 축조되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김대환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16세 소녀 벽화의 아들?

그럼 500+α년에 죽은 신라 왕자는 과연 누구일까. <삼국사기>에 아주 주목할만한 인물이 보인다.

“500년(소지왕 22) 9월 소지왕이 날이군(경북 영주)에 행차했을 때 그 지역 인물인 파로가 자신의 16세 딸 벽화를 바쳤다. 벽화는 절세미인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왕은 그냥 궁궐로 돌아왔다. 하지만 소녀의 얼굴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소지왕은 결국 2~3차례 미행을 감행하여 벽화의 집에서 사랑을 나눴다. 궁궐로 돌아오던 소지왕이 고타군(안동)을 지나다가 어느 노파의 집에 묵었다. 소지왕은 노파에게 “지금 국왕은 어떤 군주냐”고 넌즈시 물었다. 그러나 노파의 반응이 싸늘했다.

“지금 왕이 어떤 여자를 만나러 몰래 행차한다는데…무릇 용이 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잡히는 법입니다. 신중치못한 처신을 하고 있는 왕을 어찌 성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삼국사기>는 “소지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러워 하면서 벽화 소녀를 몰래 맞아들여 별실에 두었으며 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고 전했다. <삼국사기>는 두 달 후인 500년 11월 기사에서 기막힌 내용을 전한다.

“11월 소지왕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지증왕이 64살의 나이로 왕위를 이었다”는 것이다.

■유복자였을까

두가지가 이상하다. 분명히 ‘벽화와의 몰래한 사랑’으로 낳은 아들이 있었다면서…. 왜 ‘아들이 없었다’고 했을까.

이 뿐이 아니다. 500년 9월에 벽화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아들까지 낳은 소지왕이 왜 두 달 만에 죽었을까.

우선 학계에서는 ‘벽화와의 만남-아들 생산-서거-지증왕 즉위 기사’는 500년 9~11월, 즉 두 달 간의 기록이 아니고 9월 이후 3년 정도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압축·정리한 기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지왕은 벽화의 임신 도중에 서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아이는 유복자이고, 소지왕의 서거 당시에는 ‘아들이 없었다’는 표현이 맞는다. 그랬기에 지증왕이 64세의 많은 나이로 왕위를 이었다는 것이니까…. 또 유복자로 태어난 ‘소지왕·벽화의 아들’이 5~6살 이전(505~506)에 죽었다 치자.

지증왕이 선왕(소지왕)의 유복자를 위해 예우 차원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을 수도 있다. 그 경우 ‘금령총=소지왕·벽화의 아들’이 되고, ‘봉황대=소지왕릉’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소지왕 암살미수 사건

이번에 금령총 주인공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한 국립경주박물관 연구자(이현태 학예연구사)의 견해는 다르다.

금령총 주인공이 소지왕·벽화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구자는 우선 소지왕·벽화의 아들이 금관에 온갖 황금유물을 치장하고 묻혔을 리가 없다고 본다. 왜냐면 신라는 눌지왕 이후 김씨 중에서도 눌지의 직계에서 족내혼·근친혼을 거듭했다.

그런 마당에 지방(날이군·영주) 출신의 벽화 소녀를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금령총이 조성된 500년을 전후로 신라는 대격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사금갑 설화’가 심상치않다.

즉 488년(소지왕 10) 궁궐밖에 행차중이던 소지왕에게 어떤 노파가 “이 글을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는 제목이 붙은 글을 바쳤다. 소지왕은 “한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열지 않으려 했지만 일관(궁중의 점성가)은 “두사람은 일반인이고 한사람은 왕”이라고 아뢰었다. 임금이 봉투를 열자 “궁궐에 가서 거문고 상자를 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왕이 궁궐로 돌아가 거문고 상자를 쏘자(사금갑·射琴匣) 그 안에서 궁궐의 승려와 궁주가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 이 사금갑 설화는 소지왕이 반란세력을 진압한 사건을 설화로 각색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른바 소지왕 암살미수사건이다.

첩자로 위장한 고구려 승려(도림)가 궁중에 들어와 한 국가를 위기에 빠뜨린 예가 비슷한 시기 백제에도 있었다.

백제 개로왕(455~475)은 바둑 실력으로 무장한 도림의 꾐에 빠져 국고를 탕진하고 끝내 한성을 잃고 말았다.(475) 고구려가 신라 조정에도 승려 차림의 찹자를 파견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고구려 첩자인가?

또 소지왕이 500년 9월 벽화를 만난지 두 달 만에 서거했다는 <삼국사기> 기록도 심상치 않다.

소지왕이 행차한 날이군(영주)은 400년 이후 고구려 영역이었다가 수복된 지역이었다. 이 무렵 국경 지역인 날이군을 여러차례 행차하던 소지왕에게 파로라는 인물이 자기 딸로 ‘미인계’를 썼다면 어떨까. 신라 조정에서는 소지왕이 고구려 첩자일지도 모르는 파로의 딸을 궁중으로까지 데려온 것에 반감을 드러낸 세력이 있었을 수도 있다. 지증왕 세력이 정변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사실 지증왕은 눌지-자비-소지로 이어지는 눌지의 직계는 아니다. 소지왕과는 6촌(삼국사기), 또는 5촌(삼국유사) 사이가 된다. 계미년(503년 추정) 9월 건립된 포항 냉수리비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있다. 지증왕을 ‘지도로 갈문왕(왕의 근친에게 주는 봉작)’으로 지칭했다. <삼국사기> 기록(500년 11월 즉위)과는 3년의 시차가 있다. 어떤 의미일까.

지증왕이 정변으로 죽은 소지왕의 뒤를 곧바로 잇지 못했다는 것인가. 지증왕은 최소한 3년 이상 ‘섭정’한 뒤에 비로소 왕위에 올랐을 수도 있다. 달리 보면 지증왕이 3년이나 즉위하지 못했을 정도로 왕위를 두고 극심한 내분을 겪었을 가능성도 있다.

■봉황대=자비왕릉?

그렇다면 봉황대-금관총-금령총의 주인공은 어떻게 정리해볼 수 있을까.

학계는 봉황대와 같은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을 마립간 시대(356~503)의 산물로 이해한다. 내물(356~402)·실성(420~417)·눌지(417~458)·자비(458~479)·소지(479~500) 마립간과, 재위 도중(503) 칭호를 ‘왕’으로 바꾼 지증왕(500~514) 등 6명이다.

경주 시내 돌무지덧널무덤은 남→북 방향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중 대릉원 경내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황남대총이 키를 쥐고 있다.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그 북쪽에 차례로 조성된 봉황대(125호)→130호→134호의 주인공도 추정될 수 있다. 현재 황남대총의 주인공을 두고 내물왕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 뒤를 눌지왕설과 실성왕설이 따르고 있다. 그 중 이현태 학예연구사는 수십년동안 학계의 주류설이었던 ‘황남대총=눌지왕릉’을 전제로 논지를 폈다. 그 경우 그 북쪽에 조성된 ‘봉황대=자비왕릉’이고, ‘130호분=소지왕릉’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 경우 금관총·금령총·식리총·127-1·127-2호는 모두 자비왕과 관련된 인물일 수밖에 없다.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

자비왕계를 살펴보자. <삼국사기>는 ‘자비왕의 맏아들이 소지왕’이라 했고, <삼국유사>는 ‘자비왕의 셋째아들이 소지왕’이라 했다. 둘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혹시 첫째와 둘째 아들이 일찍 죽어 셋째가 ‘맏아들’의 지위에서 왕위를 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자비왕에게 또다른 아들, 즉 소지왕의 동생은 없었을까. 족보에는 없는….

이현태 학예사는 금관총의 주인공(이사지왕)을 떠올린다. 금관 등 황금 유물과 ‘이사지왕’이라는 명문 고리자루 큰칼을 3자루가 출토된 고분(지름 48.5m)이다. 고분의 규모는 황남대총보다는 작지만 유물의 위상만큼은 최상급이 아닌가.

그럼 금령총은? 앞서 밝혔듯이 소지왕·벽화의 아들은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왕자이고, 유일한 후보자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소지왕의 동생이자 금관총의 주인공인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이라는 것이다. 힌트가 하나 있다.

2018년 이후 재발굴에서 봉황대-금령총 사이에서 확인한 고분 두 기(127-1, -2호분)이다. 이 학예사는 금령총 보다 먼저 조성된 두 기의 고분을 자비왕(봉황대 주인공)보다 1세대 밑, 즉 소지왕과 같은 세대 구성원의 무덤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봉황대와 이 두 기 사이에 굳이 끼워넣은 금령총은 자비왕(봉황대)보다 2세대 뒤의 인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재발굴 하지 않은 식리총의 경우 판단유보)

이 학예사가 추론·정리한다. 소지왕이 죽었을 때 자비왕의 손자이자 이사지왕(소지왕의 동생·금관총 주인공)의 어린 아들(금령총 주인공)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였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죽고 말았다. 그 시점이 언제쯤일까.

최근 금령총에서 최소 8명의 순장자가 보인다는 견해가 부각되고 있다. 맞다면 이게 실마리를 던져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순장제도는 502년(지증왕 3) 2월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금령총은 502년 2월 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때 일부 견해대로 8명이 희생되었다면 그들은 신라 최후의 순장자로 기록될 것이다. 이것이 금령총 재발굴 성과와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까지 융합한 연구자의 견해이다. 그러나 연구자가 스스로 밝혔듯 추론에 추론을 거듭한 견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연구는 지난 100년 동안 별 진전을 보지 못한 봉황대-금관총-금령총 관련 논의에 불을 붙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 점에서 소개할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이 기사를 위해 이현태·김대환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와 심현철 국립경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오세윤 사진작가,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이현태, ‘금령총 주인공 비정’, <금령총 주인공과 그의 시대>(발굴 10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엄 발표집), 국립경주박물관, 2024

김대환, ‘금령총 출토품의 신고(新古)와 장례 시점’, <금령총 주인공과 그의 시대>(발굴 10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엄 발표집), 국립경주박물관, 2024

신광철, ‘재발굴을 통해 본 금령총의 구조와 성격’, <한국학연구> 77호,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2021

심현철, ‘신라왕릉 변천과 마립간릉’, <한국고고학보> 116호, 한국고고학회, 2020

장창은, ‘신라 소지왕대 대고구려관계와 정치변동’, <사학연구> 제78호, 한국사학회, 2005

이현정·강정무, ‘금령총 출토 마구의 과거와 현재’, <신라능묘특별전4> 금령총 학술 콜로키움, 국립경주박물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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