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의 거리 15분이 집을 바꾼다”…돌봄, 교통·학군보다 급한 현실 [육아동네 리포트 ⑥]

2025-05-09

조부모 돌봄 48.8%, 정부 아이돌보미 3.9%… 육아는 가족 몫

“공공 돌봄 3.9%뿐”… 돌봄 사각지대, 집까지 바꾸게 만들었다

“친정이 목동이라 차로 15분 거리에요. 정기적으로는 아니어도 급할 땐 오셔서 도와주세요. 애 키우다 보면 그런 순간이 정말 많잖아요”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사는 박모(35)씨는 세 살배기 딸을 키우는 워킹맘이다. 박씨는 집을 알아볼 때부터 ‘엄마가 오기 편한 동네인가’를 먼저 따졌다. 박씨는 “결국 우리 생활의 안정성은, 누가 아이를 잠깐이라도 맡아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집을 고를 때 평수, 브랜드, 학군은 기본이 됐다. 그 위에 ‘돌봄’이라는 현실적인 조건이 더해지며, 3040 세대의 주거 선택은 한층 복잡해지고 있다.

경기도 광명 철산역 인근 신축 아파트에 살던 이지현(37·여)씨는 최근 마포역 인근의 구축 아파트로 전세 이사를 했다. 기존 집은 전세를 주고, 조부모님으로부터 육아를 도움 받기 위해 거주지를 옮긴 것이다.

두 지역 모두 전용 59㎡ 기준 전세 시세는 4억~5억원대로 비슷하지만, 그는 “아이를 돌봐줄 친정엄마가 서울역에서 차로 15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라는 점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친정이 지방인 이씨는 “집 상태나 연식만 보면 광명 쪽이 훨씬 낫지만 육아할 땐 ‘누가 아이를 봐줄 수 있느냐’가 제일 중요했다”라며 “엄마가 서울역에 도착해서 바로 올 수 있다는 게 컸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전국보육실태조사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맞벌이 가정 가운데 조부모에게 돌봄을 받는 비율은 48.8%에 달했다. 이는 한국의 육아가 여전히 가족, 특히 조부모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전 조사인 2018년 조사에서는 ‘개인 돌봄 이용 가정의 83.6%가 조부모에게, 88.4%가 친척 등 가족에게 아이를 맡기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 돌봄’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같은 기관 돌봄이 아닌, 가족이나 친지 등 개인이 맡아주는 형태의 돌봄을 의미한다.

서울 중랑구에 살던 김지은(가명·37)씨 부부는 첫째 육아 초기 예상치 못한 일정이 생길 때마다 큰 부담을 느꼈다. 시터를 쓰자니 낯선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는 게 불안했고, 부모님은 거리가 멀어 자주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다.

그런 김씨 부부에게 가장 든든한 조력자는 김씨의 언니였다. 김씨는 “언니가 광진구에 살고 있어서 급할 때마다 와서 아이를 봐주곤 했다”라며 “믿을 수 있는 가족이 가까이 있다는 게 이렇게 큰 안정감을 줄 줄 몰랐다”라고 말했다.

김씨 부부는 급할 때마다 언니의 도움을 받기 위해, 더 가까운 광진구 자양동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그는 “집 크기나 새 아파트라는 조건보단,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근처에 있다는 게 훨씬 중요하더라”고 말했다.

현재 정부는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에게 월 20만~30만 원 수준의 수당을 지급하며, 육아 부담을 덜고 맞벌이 가정의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소득 기준 등 지원 조건이 까다로워 실제로 혜택을 받는 가구는 제한적이며, 정책 실효성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서울형 아이돌봄비’는 조부모 등 친인척이 손주를 돌보는 가정에 월 30만 원의 돌봄비를 지원하는 제도로, 2023년에는 4300명 규모로 운영됐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 소장은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는 일이 자연스럽게 여겨지지만, 사실은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라며 “육아 지원금이나 혜택만으로는 가족에게 집중된 돌봄 부담을 해소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맞벌이로 인한 세수 확대와 경제적 성장의 이면에는 돌봄 공백이 존재한다”며 “단기적인 지원보다 공공 보육시설과 같은 실질적인 인프라 확충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양다훈 기자 yangb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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