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심은 절묘했다. 압도적 승리를 장담했던 이재명은 50% 능선에서 멈췄다. 추월을 꿈꿨던 김문수는 헐떡이며 8부 능선에 겨우 도착했고, 막말 파동에 철퇴를 맞은 이준석은 청년들의 격려를 품에 안고 주저앉았다. 그런데 보수·진보 결집표 격차는 나노급이었다. 진보 합산표가 보수를 0.93% 앞선 상태, 가히 균등 분할이라 할 만하다. 기세등등했던 이재명의 포효에 유권자들이 견제구를 날렸고, 지리멸렬했던 국힘 후보엔 등을 밀어준 셈이다.
보수와 진보 결집표는 균등 분할
싸우지 말라는 국민의 뜻 새겨야
정의·통합·실용엔 소신 절제 필수
광장 떠나 글로벌 무대에서 보길
누구도 지지 않은 선거였다. 난투장 정치판을 국민이 절반씩 갈라 모두 승자로 만들었다. 보수가 궤멸한 것이 아니고 진보가 약진한 것도 아니다. 돛도 닻도 잃고 헤매던 보수에 저런 격려의 표심을 줬다는 국민의 뜻에 진보는 겸손해야 한다. 지난 대선, 0.73% 표차를 무시했던 윤석열 정권이 결국 파국을 맞았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패자가 출현한다. 다름 아닌 대한민국이다.
취임 7일째, 이재명 정부의 첫 행보는 비교적 신중해 보인다. 요란했던 전임 대통령들의 상징적 행동에 비하면 그렇다. 아직도 그 장면들이 생생하다. 이명박은 취임 다음 날 기다렸다는 듯이 목포 대불 산단으로 달려가 전봇대를 뽑았다. 규제철폐 선언이었다. 박근혜는 광화문 광장에 열기구보다 큰 오방낭을 갖다 놓고 국민 행복을 빌었다. 무속이 따로 없었다. 인천공항공사로 달려간 문재인은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선언했다.
그대로 됐다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모두 허황한 꿈이었다. MB정권은 광우병 파동에 철퇴를 맞아 처음부터 비틀거렸는데, 결국 4대 강 물막이 공사로 진로가 막혔다. 부친의 초상이 걸린 관저 깊숙이 들어앉았던 박근혜를 대신해서 팔상시와 최서원 패거리가 한껏 행복을 즐겼다. 통계조작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비정규직이 무심히 늘었다. 청와대 브리핑룸에 설치된 고용 게시판은 어느 순간 치워졌다. 청년들은 비정규직을 전전해야 했다.
‘정의로운 통합정부, 유연한 실용정부’. 이재명 대통령이 내건 문패는 MB, 박근혜, 문재인을 섞어 좋은 것만 추려낸 것이다. 이 목표가 이뤄지려면 이재명 자신이 평소의 언행과 가치관을 바꿔야 한다. 일대 변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갈라치기로는 ‘통합’이 어려우며, 기업규제와 기본소득으론 ‘실용’이 불가하고, 자신을 대권까지 밀어 올렸던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 ‘유연’은 없다. 민주당의 부산한 물밑 작업이 걱정스러운 이유다. 급류를 타고 있는 대법관 30명 증원, 3대 특검법, 검사징계법, 이재명 방탄법은 일대 사화(史禍)와 유배형을 예고한다. 칼바람이 휘몰아칠 것이다. 사법, 입법, 행정 삼권을 완전히 장악한 정권은 민주의 길을 이탈해 독재로 나아간다.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정치 논리다. 정의감은 잠시, 통합권력의 유혹에 빠져든다.
독재의 문을 눈앞에 둔 이재명 대통령이 국내 정치를 시작하는 첫 행보로 먼저 글로벌 무대로 나가보기를 권한다. 마침 ‘G7 플러스 정상회의’로부터 날아온 초청장에 화답한 것은 환영할 일이다. 평생 성남과 경기도를 맴돌다가 투쟁 일변도의 야당 대표로 바라봤던 대한민국이 외부에서는 얼마나 다른지 체득할 좋은 학습기회다. 법원과 투쟁 전선에 익숙한 이재명이 세계 최정상급 지도자들이 모이는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새롭고 도전적인 장면이다. 문법과 세계관이 너무도 다른 글로벌 지도자들이 삼권을 거침없이 장악해가는 한국 지도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실감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과 마주 앉을 일이 걱정이다. 두 사람의 경험의 차이는 태평양만큼이나 넓고, 이념의 거리는 한없이 멀다. 트럼프 정부는 이재명 당선 축하 인사에서 중국의 영향력 위험을 언급했다. 민중적 성향을 다분히 드러낸 이재명 대통령의 인생 궤적과 친중(親中)·친북(親北)을 암시하는 평소의 소신 발언이 백악관 레이더에 걸렸다는 증거다. 트럼프를 추종하는 MAGA 극우파는 공산주의 운운했다. 그런 오해를 어떻게 부식할 것인지, 글로벌 무대를 호령하는 노회한 거인(巨人)을 어떻게 회유할 것인지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문제. 능수능란한 정치인 이재명으로서도 처음 맞는 난관에 봉착했다. 국내 해명이야 쉽지만, 국제적 검증에서 ‘불신’ 판정이 나면 대통령은 물론 한국의 앞길이 어두워진다.
한국은 미래 잠재력을 품고, 도전과 응전에 강하고, 젊은 청년들이 패기를 뽐내고, 일상을 뒤집는 ‘컬처’로 세계인을 유혹하는 나라다. 광장에서 만들어낸 정책 공약들, 검증 안 된 정책을 서둘렀다가 집권 내내 발뺌만 해댔던 전임 대통령들의 궁색한 운명을 얼마나 아프게 목격했는가. 무소불위 이재명 정권이 무엇을 못 하겠는가만 그럴수록 두루 눈치 살피기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패자가 되지 않게 하려면 광장을 떠나 외부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권한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