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8월에 무더위가 한창일 때, 언론에서는 ‘건국절’과 ‘뉴라이트’, ‘친일파’와 ‘밀정’이 회자되었다. 일제식민지 시대 “한국민의 국적이 일본이었다” 라고 버젓이 말하는 지도자를 바라보면서 일제 강점기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세 여성들을 생각해 본다.
먼저 석주 이상룡 애국지사의 손주며느리 허은과 이회영 애국지사의 부인 이은숙이다.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와 이은숙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1910년 8월 29일 불법과 강요되었던 일한병탄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나라가 없어져 수많은 국민들은 토지를 빼앗겼으며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런 일제의 폭압을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남자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총칼을 들고 항일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아울러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향의 전답과 종가집을 헐값에 팔았다.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땅으로 이주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인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만주와 서간도에 정착하여 그동안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였다. 시부모와 자녀의 생계는 물론 찾아오는 애국지사와 손님들까지 모든 수발을 책임져야 했다. 낯설고 광활한 땅에서 신흥무관학교, 경학사, 부민단, 서로군정서 등을 이끌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남편과 시부를 위해 살아갔다. 살이 떨어져 나가는 혹독한 겨울 추위, 수토병과 장티푸스, 온갖 전염병과 싸웠다. 독립운동은 순탄한 것일 수 없었다. 일제 경찰의 독립군 토벌작전, 친일 밀정들의 밀고와 배신, 중국 군인과 마적들의 야만적 횡포 속에서도 살아남아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 그녀가 결혼생활 36년동안 미국에서 남편과 같이 지낸 기간은 불과 14년 가량이다. 도산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중국 등지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할 때에 홀로 5남매를 키우며 묵묵히 남편 일을 도와주면서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동지들을 도왔다. 도산은 이렇게 아내에서 편지를 보낸다. “당신이 힘들다는 것을 아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기고 고난을 겪는 동포를 두고 어떻게 나만 편안히 미국에 있겠소? 나는 우리 동포들을 버릴 수 없소.” 이 편지를 받고 이혜련은 남편을 나라에 맡기고 가족과 동지들을 수발하는데 오로지 전념한다.
이와같이 빛나는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의 손부, 우당 이회영 부인, 도산 안창호의 부인도 나라독립의 대의(大義)를 위해 만주와 미주에서 치열하게 살아갔다. 남편들이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헌신 때문이었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를 실천한 명문가의 전형인 것이다. 그들의 가문과 자녀들은 이 나라의 정신적, 역사적 대들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