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서면선 노래방 도우미 등 윤 정권들어 억눌린 딸들 광장으로
‘TK의 딸’ 챌린지 등 저마다의 색깔…큰 울림 갖고 전국으로 퍼져
[주간경향]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얼마나 될까. 지난 12월 14일 열린 서울 여의도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200만명의 시민이 모였다. 이들이 전부일 리 없다. 부산 서면에서, 대구 동성로에서, 충북 청주의 충북도청 서문에서 “이제껏 보지 못했던 많은 인파”가 모였다. 이 지역들만이 아니다. 전국 거의 모든 지역에 광장이 열렸다. 매서운 겨울 날씨에도 지역의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폭력과 혼란의 정국이 종식되길 기대하며, 동시에 탄핵 이후의 세상을 그리며 국회의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지켜봤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회가 있는 여의도로 한달음에 달려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우리 동네 광장’에 모였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자, 내가 사는 우리 동네를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동네 광장들은 응원봉 등 여의도 광장의 ‘신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면서도 저마다의 색깔을 띠었다. 동네 광장의 목소리가 때로 커다란 울림을 갖고 전국으로 퍼지는 일을 지켜보기도 했다. 광장에 모였던 동네 사람들은 “이 광장이 탄핵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여의도보다는 서면 집회가 할 만합니다. 훨씬 따셔요.”
A씨는 일을 하지 않는 날이면 어김없이 부산 서면에서 열리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석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지난 12월 11일에는 단상 위에 올라 3분짜리 자유발언도 했다. “저는 저기 ○○○에서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소위 말하는 술집 여자입니다”로 시작하는 그의 발언은 순식간에 좌중을 집중시켰다. 이어지는 발언도 충격을 줬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에 나와서, 탄핵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면서도 탄핵을 “완성”이나 “끝”이 아닌 하나의 “고비”라 표현했다. 그러면서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정치와 우리 주변의 소외된 시민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해달라고 동료 시민들에게 당부했다. 탄핵 너머를 그리는 그의 발언은 커다란 울림을 갖고 전국으로 퍼졌다.
A씨는 지난 12월 16일 통화에서 “제 친구들은 성소수자나 장애인, 가난한 청년들이 대부분이에요. 제가 트위터(현 X)를 많이 하는데, 계엄 이후에 한탄하는 글이 올라온 걸 봤어요. ‘우리가 시민이라고 같이 호명되는 게 얼떨떨하다. 평소 2등 시민 취급을 받아왔는데, 이 사태가 끝나면 도로 2등 시민으로 돌아갈 텐데’라는 글이었는데 그 글을 보고 너무 슬펐어요. 새벽에 잠이 안 와서 내가 발언한다면 어떤 말을 쓸지 쭉 써서 가지고 있다가 며칠 뒤 올라가서 발언하게 됐어요”라고 했다.
스스로 직업을 밝힌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그는 “나도 시민이다.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도 여러분과 다를 바 없다. 한 사람으로 존중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어요”라고 했다.
그는 자유발언에서 ‘전 세계적인 우경화’ 풍조를 언급하면서 그 원인으로 ‘시민교육의 부재’와 ‘소속될 만한 적절한 공동체의 부재’를 꼽았다. 그리고 이 흐름을 막지 못하면 또다시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A씨는 “일을 하다 보면 일베 용어를 사용하는 20~30대 남성을 굉장히 많이 봐요. 마땅히 들어갈 공동체가 없으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부추기는 말과 행동을 하고, 그 커뮤니티에서 네임드(유명한 사용자)가 되고 싶어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사람들과 길게 대화를 하다 보면 본질적으로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인 걸 알게 되더라고요. 그들 또한 시민이고 한 표를 가지고 있다면, 대화하고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했다.
단상에 오르기까지는 두려움이 더 컸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내려와라”라고 소리칠 것만 같았다. A씨는 “여의도 집회 영상을 봤는데,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 밝히면서 발언한 분이 있었어요. 그때 한 남성분이 ‘내려와라’라고 얘기하는 걸 봤어요. 저도 ‘내려와라’ 소리 들을까 봐 엄청 졸아(위축돼) 있었어요. 그런데 없었어요. 막바지에는 ‘내려오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겠구나 싶어 울컥했어요”라고 했다.
그의 발언을 두고 ‘노래방 도우미가 아니라 전문 시위꾼이 아니냐’는 악플이 달리기도 했다. 사회를 관심 있게 들여다본 사람의 통찰이 그의 발언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는 계엄 이후에도 하루걸러 하루꼴로 출근하고 있다. 계엄 선포 이튿날에는 여전히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손님이 팁으로 준 10만원으로 핫팩 200개를 사 집회에 온 시민들과 나눴다. A씨는 “중·고등학교 때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기사들을 보면서 의식이 살짝 생겼던 것 같아요. 스무 살 때쯤 트위터에서 성소수자 인권, 여성 인권, 장애인 인권 같은 얘기를 접했어요. 대학교는 가지 못했지만, 당사자들과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깨달은 것들이 정말로 많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현재 대학교에 가기 위해 등록금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A씨는 “어릴 때부터 NGO(비정부기구)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어요. 아이들 교육을 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어요. 대학교에 가게 되면 인권단체나 사회단체에서 일해보고 싶어요”라고 했다.
서면 플레이리스트의 비밀
그의 발언이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부산 서면 집회의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서면 집회는 소수자에게 따뜻하고 혐오와 차별에는 엄정했다. 윤석열 퇴진 부산 시민대회의 공식 소식채널인 ‘뭐라카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는 ‘평등한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이라는 글이 올라와 있다. 이 글은 “모든 참여자는 여성·성소수자·장애인·청소년·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대상화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 지난 12월 9일 서면 집회에서 한 시민이 ‘트랜스젠더’임을 밝히자 좌중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같은 날 한 20대 여성은 “혐오와 갈라치기로 당선된 자의 끝이 어떠한지 우리는 목도하는 중”이라며 “내란수괴 혐오자 윤석열을 탄핵하라”고 외쳤다. 내란수괴와 혐오자를 동일선상에 놓은 이 발언도 큰 호응을 받았다.
서면 집회의 분위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하나는 집회 참가자들의 구성이다. 집회를 라이브로 유튜브에 송출하기도 했던 ‘뭐라카노’의 신성호 운영위원은 “집회 참가자 중에도 10~30대 여성이 많았고, 자유발언에 나선 분들도 10~30대 여성이 많았다. 윤석열 정부에서 쌓여온 분노가 폭발한 자리였지만, 여성으로서 또는 소수자로서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받았던 차별과 멸시가 응축돼 터져 나온 자리였다고 본다. 처음엔 한 명씩 용기를 내서 발언했는데, 호응이 뜨겁다 보니 계속 이어졌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역에 그리 많지 않은 시민단체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쌓아온 역사도 영향을 미쳤다. 부산에서 인문학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을 벌여온 권명아 동아대 교수는 “서울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조직들이 같이 연대해온 역사가 길다 보니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차별 발언은 안 된다는 게 자연스럽게 이야기됐다”고 했다.
서면 집회가 당파성이 적고, 덜 권력 지향적이었다는 점도 어쩌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여의도 집회에서는 페미니스트의 자유 발언을 두고 좌중에서 “끌어내려”라는 외침도 터져 나왔다. 다양한 사람이 모인 여의도 집회는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요구의 최대치가 ‘탄핵’ 내지 ‘정권 교체’로 한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더불어민주당의 존재가 중력처럼 작용한 셈이다. 권 교수는 “부산 시민 전체의 인권 의식이 높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여의도와 달랐던 부분은 있었던 것 같다. 여의도 집회는 민주당이나 정치적 다수자들이 권력을 재생산하는 장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서면은 권력에서 멀고, 도구로서의 쓸모도 크지 않다. 여의도와 달리 서면에 와서 한마디 하려는 국회의원은 없지 않나”라고 했다.
계엄 선포 이후 매일 열린 서면 집회는 회를 거듭할수록 새로워졌다. 대표적인 것이 ‘집회 플레이리스트’다. 처음에는 민중가요로 채워졌다가 중반에는 젊은 참석자들을 위해 대중가요로 채워졌고, 이후에는 민중가요와 대중가요가 절반씩 섞인 플레이리스트로 정착했다. 신성호 운영위원은 “참가자들이 ‘20~30대 청년이 많이 온다고 대중가요만 틀지 말고, 민중가요도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이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분들도 올 수 있게 민중가요를 틀어줘라’라는 의견을 줬다. 그래서 반반씩 틀게 됐다. 집회 참가자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많이 좋아했다”고 말했다.
“제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느낀 한을 날카롭게 갈아서 국민의힘에 흠을 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구에 사는 20대 여성 B씨는 지난 12월 7일 한자 한자 꾹꾹 눌러쓴 대자보를 들고 대구 동성로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석했다. “우리는 보수의 텃밭이 아니다!”로 시작해 “TK의 콘크리트는 TK의 딸들에 의해 부서질 것이다. 몇 년이 걸려도 반드시 부서질 것이다”로 끝나는 그의 대자보는 대구 집회의 상징적인 문구가 됐다. 이후에도 많은 시민이 대자보의 문구로 피켓을 만들어 집회에 참석했다. 이른바 ‘TK의 딸’ 챌린지다.
B씨는 “국회에서 계엄 해제 표결을 할 때 국민의힘 의원 다수는 당사에 모여 있었다는 걸 듣고 화가 났다. 12월 6일에는 한동훈 대표가 탄핵에 찬성할 것처럼 하다가 입장을 바꾸고, 대통령이 국회에 온다더니 안 오고, 이런 걸 보며 손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여기(대구)만 믿고 오만하게 행동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까지 양심이 없는데 TK가 일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오만함에 흠집을 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대자보에서 TK의 콘크리트를 부수는 것은 ‘자식’이 아니라 ‘딸’이다. B씨는 “굳이 그렇게 썼다. 정치적인 것 외에도 대구는 굉장히 가부장 문화가 뿌리 깊은 도시고, 권위적이고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동네다. 가장 억눌린 존재가 딸이다. 이 지역에서 가장 억눌린 딸들이 TK 선거를 좌우하는 주체가 될 수 있고, 될 것이라고 표명하고 싶었다”고 했다.
B씨의 ‘한’은 외로움에서 비롯됐다. 가족 몰래 대자보를 썼을 정도로 지역에서도, 집에서도 정치적 견해에 있어 소수자인 그는 줄곧 “외로움과 콱 막히는 답답함”을 느껴왔다. B씨는 “‘비난받으면 어떡하지, 나 혼자 이런 거 들고 있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에 벌벌 떨면서 썼는데, 집회에서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제 대자보를 읽고 나왔다는 분도 있었고, 어떤 분은 주머니에 초콜릿도 넣어줬다. 생각보다 콘크리트는 두껍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회원들의 송년회도 동성로 집회에서 열 만큼 열성적으로 집회에 참여한 대구여성의전화의 송경인 대표는 “다른 곳도 그렇지만 대구 집회도 여성들의 발언이 많았다. 대구의 부모 세대, 조부모 세대와 내 정체성이 왜 다른지, 왜 내가 힘든지를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나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지향하는 세상에 대해 윗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자리였다고 본다”고 말했다.
“저는 계엄령이 선포된 날 국회 앞을 지킨 시민들의 헌신이 감동적이면서도 너무나 슬펐습니다.”
청주에 사는 20대 여성 비정규직 C씨는 지난 12월 10일 충북도청 앞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석해 단상에 올라 발언했다. 그는 ‘이것만은 안 된다’며 국회 앞으로 모인 사람들에게서, 역설적으로 그간 우리가 포기했거나 혹은 침해당했던 권리들을 보았다. 그것은 주 120시간 노동도 가능하다는 대통령의 인식 앞에,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호언장담 앞에 빼앗겼던 권리들이기도 했다. C씨는 자유발언에서 탄핵 너머의 사회를 전망했다. 그는 발언에서 “대통령이 바뀐들, 집권당이 바뀐들, 여전히 습관처럼 시민의 권리를 타협 가능한 자원처럼 취급하는 정치인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면 우리는 (중략)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것만은 안 된다는 마음으로 다른 어떤 곳에서 또 만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C씨는 12월 17일 통화에서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이 저와 같은 해에 태어난 학생들이었다. 저는 그때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세상이 절대 절대 예전 같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박근혜 탄핵 때도 집회에 참석했고, 비슷하게 느꼈다. 그런데 이제 와 보면 그냥 권력이 재배치 되는 정도로만 끝났다고 느낀다. 적폐 청산이 얼마나 시민들에게 와닿는 구호였는지 모르겠다. 그나마도 자기들끼리 사면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도 같은 우려를 하고 있다. 반여성주의를 기치로 지지를 얻은 윤석열 정부의 집권 후 C씨는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탄핵 집회가 열린 전국 각지의 광장에 10~30대 여성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 것은 윤 정부 치하에서 이들이 그만큼 절박함을 느꼈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그러나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후 더불어민주당은 여당인 국민의힘에 경제·민생 분야에 한정한 국정안정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C씨는 “먹고사는 문제를 논의의 최소치가 아니라 최대치로 잡고 담론을 형성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먹고사는 것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포기할 수 없는 권리들이 있는데 왜 자기들 마음대로 뒤로 미루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여의도 집회에는 다양한 지역의 시민들도 참가했다. C씨는 청주의 광장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한 이유에 대해 “내가 사는 곳을 잘 살게 만드는 게 저에게는 중요한 일이 됐다. 저는 청주에 살고 싶어서 남은 사람이다. 물론 직장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서울에 사는 건 나답게 사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울을 바꾸는 것보다는 청주를 바꾸는 게 쉬울 것 같았다. 탄핵당했으니 헌재에서 알아서 하겠지 하기보다는 청주의 광장이 조금 더 열려 있으면 좋겠다. 우리의 열망을 갈무리할 시간이 좀더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