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 9월 수상작] 말하지 않고 말하는 가슴속 상처들

2024-09-29

장원

돌강

나정숙

빈 강이 찾아오자 저녁이 휘어진다

부딪혀 깨어지고 흐르는 돌들의 말

후미진 청미래덩굴 아래

바람으로 맺힌다

가슴 속 너덜겅을 누군가 걷고 있다

물 없는 강바닥을 긁으며 흘러가는

예리한 물색 칼날에

난 온몸이 베인다

가끔씩 길을 묻는 물총새 긴 그림자

이별을 배우지 못해 말수가 줄어든다

물때의 방향을 따라

짐승이 울고 있다

차상

수프리모

최종천

부드럽고 우아한

콜롬비아로 떠났다

깜깜한 그 바다는

상상보다 깊었다

쓴맛은 그리움처럼

까닭 없이 길었다

차하

보자기는 네 개의 귀로 산다

김정서

안으로 묶인 가난 새 나가지 않는다

감싸는 네 귀퉁이 공손하게 귀가 밝아

비밀을 지키고 앉아 바깥을 동여맨다

보따리 안에 숨긴 홀어미의 얇은 소문

몸가짐 단정해도 가가호호 눈빛들은

가장의 마른 억척에 매듭이 풀어진다

수군거린 날들을 머리에 이고 지면

네 개의 귀가 닫혀 식솔을 지켜줄 때

떼놓은 목소리들이 올망졸망 들린다

이달의 심사평

이달의 응모작들은 수준 차가 컸다. 시조의 기본적인 형식에서 벗어난 작품과 고루함과 진부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의식과 누구나 지닌 보편적 삶의 무게를 내면의 사유로 녹인 작품들도 많았다.

그 중에 가린 작품으로 ‘돌강’(나정숙)을 장원으로 올린다. 보내 온 작품들 중 어느 작품을 장원으로 낙점해도 좋을 정도로 고른 수준을 보였다. 저녁이 오는 빈 강을 배경으로 깔아 놓고 “부딪혀 깨어지고 흐르는 돌”, “가슴 속 너덜겅”을 걷는 시적 화자의 상처 입은 복잡한 감정을 “이별을 배우지 못해 말수가 줄어”들어 “물때의 방향을 따라 짐승이 울고 있”는 내밀하고 차분한 흐름으로 마무리하는 시의 전개에 독자를 동참하게 하고 있다. 이른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시적 효과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아닌가 싶다.

차상으로 ‘수프리모’(최종천)를 선했다. 수프리모는 콜롬비아산 커피로 ‘최고’라는 뜻이라고 한다. 3장 6구 45자 내외의 팽팽한 시조 형식에 커피가 주는 맛과 향, 그 맛과 향이 품은 바다 같이 깊은 상상을 거쳐 긴 그리움의 쓴맛으로 마무리 하였다. 시조의 정수라고 하는 단수 시조의 매력을 품질 좋은 한 잔의 진한 커피처럼 잘 살린 작품이다.

차하 작품은 ‘보자기는 네 개의 귀로 산다’(김정서)이다. 역시 보내온 작품들 모두가 고른 수준을 보여줌으로써 응모자의 시적 역량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고전적 소재임에도 “네 개의 귀”를 가진 “보자기”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녹록지 않은 홀어미의 삶에 절묘하게 겹쳐 놓았다. 특히 “안으로 묶인 가난”, “바깥을 동여맨다” “얇은 소문” 등과 같은 형용모순적인 시어 부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김라희의 작품을 오래 손에 들고 있었음을 밝히며 다음을 기약한다.

심사위원 서숙희(대표집필), 손영희

초대시조

아주 소박한 다짐

조경선

백 년 된 국밥집

벽에 걸린 문구 하나

구십구 세 이상만

흡연이 가능함

나는 꼭

이 집에 와서

담배를 피워야겠다

◆조경선

경기 고양 출생, 201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김만중문학상 신인상, 정음시조문학상 수상, 시집 『목력』, 『개가 물어뜯은 시집』, 『어때요 이런 고요』.

굴뚝에 연기 피어오르고 밥이 끓는 냄새가 나는 노포에 가고 싶은 계절이다.

밖에서 일을 하거나 시간에 쫓겨 급히 한술 뜨고 가야할 사람들이 문턱 낮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국밥집, 시인은 국밥집에 들어 허기를 채우고 잠시 숨 돌리다 벽에 걸린 문구를 보았나보다, ‘담배를 피우지 마라’는 것을 직접 말하지 않고 넌지시 문구를 걸어놓은 것은 건강을 생각하라는 국밥집 주인의 깊은 뜻이지 싶다. 담배를 피우려는 손님의 불만을 잠재우며 웃음 짓게 만드는 주인의 재치와 지혜로운 문구를 낚아챈 시인의 안목이 예사롭지 않다. “구십구 세 이상만/ 흡연이 가능”하다는 국밥집 주인은, 백 년의 전통을 보여주듯 반쯤 남은 뚝배기에 뜨거운 국물을 더 채워줄 푸근한 인상을 가진 분이라 여겨진다. 노동의 고단함을 국밥과 소주 한 잔으로 풀어내며 서로를 위로하는 왁자한 웃음들도 뚝배기에 담겨 출렁거리겠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인간적인 소망을 노래한, 시인의 ‘아주 소박한 다짐’이 초가을 나지막이 핀 들국처럼 읽힌다.

시조시인 이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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