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은 모임에 참석하기가 겁이 난다.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언급했음에도 꼭 사달이 난다. 얼마 전 토지를 강제수용 당한 지인이 보상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그래도 토지 국유제의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가 낫다고 하자 난데없는 이데올로기 논쟁이 벌어졌다. “자본주의의 대척점은 민주주의지 공산주의가 아니다. 공부 좀 해라.” 중간에서 만류하던 친구는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지만, 다음 말은 다 개소리다.” 색깔을 분명히 하란 소리였다. 헤어질 때 그 친구는 내게 슬프다고 했다. 슬픔보다는 분노에 찬 얼굴이었다.
좌우 진영론 앞에서 슬픔 고백
이념 혼란기 거치며 K문화 단련
슬픔의 승화가 예술이 하는 일

나는 슬픔이란 단어에서 소설가 박완서를 생각한다. 작가 이문열이 2001년 좌파 시민단체를 비판하는 칼럼을 쓰자, 그의 책을 태우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소설가 박완서는 그건 아니라고 만류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좋은 말로 중용이고 부정적으로 회색이었다. 그때 쓴 산문이 ‘작가의 슬픔’이었다. “나는 참여도 좋아하고 순수도 좋아하고 심지어는 참여하고 순수하고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러나 나더러 참여냐 순수냐 그 어느 편에 속하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어지면서 다만 슬픔을 느낄 뿐이다.” 한국전쟁 중 양쪽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가족까지 잃었던 소설가에게 진영론은 슬픔이었다.
내란 혐의로 52일간 구금되었던 대통령이 석방되었다. 재판부는 그의 구속을 취소했고 검찰은 항고를 포기했다. 그러자 비난이 일제히 검찰과 사법부로 쏟아졌다. 나는 기사를 읽으면서 독일의 ‘바이마르 문화’를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에서 11월 혁명이 일어났다. 왕정이 무너지고 의회 민주주의가 수립되었을 때 사람들은 희망으로 들떠있었다. 그들은 시끄러운 베를린을 피해 바이마르에서 헌법을 제정했으니 일명 ‘바이마르 헌법’이다. 변혁은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우파가 장악한 전 시대의 사법부는 그대로 존치되었다. 판사와 검사, 기득권층이 합심해서 좌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좌우 양쪽에서 살인과 폭행이 일어났지만, 우파에 대한 사법부의 처벌은 가벼웠다.
기록에 의하면 좌파의 범죄 22건은 사형 10건에 나머지는 중형 처벌이었다. 그러나 우파가 저지른 암살 사건 354건은 모두 무죄를 받았고 단 1건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 심지어 국적이 오스트리아인 히틀러가 독일에서 일으킨 폭동은 ‘애국심에서 일어난 발로’라며 9개월의 징역을 살았을 뿐이었다. 법은 있었지만 적용되지 않았고 기준은 판사와 검사의 마음이었다. 광기의 시대가 도래하는 불길한 전조는 도처에서 나타났다. 관료는 무책임했고 사법부의 판결은 치밀한 우익 편향이었으며 언론은 중구난방 흥미 위주였다. 기득권층이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을 알리는 신문이 없었다. 유일하게 정론을 펼치는 ‘프랑크푸르트 신문’이 있었지만 읽는 이가 없었다.
자유가 지겨워 독재자를 불러들인 것처럼 히틀러의 등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지식인들의 공헌이었다. 지배자가 아닌 국민이 주인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입으로 공염불을 외우지 않았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20세기의 르네상스 바이마르 문화가 탄생했다. 바이마르에 모인 예술가들은 예술과 기술이 결합한 새로운 시대정신을 양산했다. 건축가 그로피우스가 세운 바우하우스의 교수진은 파울 클레, 칸딘스키 등 유명 화가와 조각가들이었다. 문학과 미술·연극·과학·건축 등 실험 정신의 바이마르 문화는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까지 13년간의 짧은 황금기를 이었다. 권력을 잡은 나치가 학교를 폐쇄하고 예술가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정치와 경제의 대혼란 속에 만개했던 바이마르 문화는 결국 망명의 길을 걷게 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들의 정신은 그렇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대한민국도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를 거쳐 민주주의가 정착되기까지 혼란을 거쳤다. 적폐 청산인지 정치 보복인지 헛갈리는 권력 행태가 만연했고 사법부가 앞에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작가와 화가·음악가 등 수많은 예술가가 탄생했다. 그러나 사법부가 예술 언어를 일상 언어로 등치 하면서 작가들이 곤욕을 치렀다. 사유하지 않는 판사, 법률 용어에만 몰두하는 검찰은 불온한 예술가보다 더 위험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는 이유로 예술가가 구속되고 핍박받았지만, 정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제 우리는 K팝은 물론 전 세계가 열광하는 음악가·화가·작가를 배출한 국가가 되었고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 정점에 있다. 우리 문화의 자양분은 앞서간 선배 예술가들의 슬픔이란 생각이 든다. 슬픔을 카타르시스로 이끄는 것이 예술의 일이다.
다시 소설가 박완서를 생각한다. 그는 세상이 바뀔 때마다 빨갱이로 몰렸다가 반동으로 몰리는 삶을 살았고 중도의 길을 걷다가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다.
가족과 친구가 분열하는 불편한 세상, 누가 우리의 슬픔을 놀아주랴.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