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다. 사람들은 각자의 주관적 가치에 따라 진실을 선택한다. 다양한 사실과 관점이 진실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누구도 진실을 독점할 수 없다. 지난달 국회 청문회의 한 장면은 우리가 탈진실의 중심에 있음을 잘 보여줬다. 한수원 노조위원장은 후쿠시마 원전 방류수를 오염수가 아니라 처리수라 규정하며 인체에 해가 없다고 했다. 그는 원자력 전문가로서 “양심을 건다”고까지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공론장은 “후쿠시마 방류는 제2의 태평양전쟁” “제주 어민은 끝났다”는 분노 여론으로 넘쳤다. 지난 계엄 직후 확산된 ‘중국인 99명 체포설’도 마찬가지다. 사실과 무관한 소문이 사회를 흔들고 극단적 대립을 증폭시켰다. 세월호 잠수함 충돌설, 광우병 괴담도 다르지 않았다.
탈진실 시대, 진실 찾기는 불가능
공정은 다양성 존중에서 출발
사실·관점의 다양성 보장 필요
사회적 진실에 대해 성찰해야
진실은 탈진실 시대에도 소중하다. 그러나 탈진실 시대에는 같은 사실조차 다르게 해석된다. 공론장에서 모두가 공감하는 ‘사회적 진실’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디지털 플랫폼(빅데이터, 유튜브, SNS)은 하나의 진실을 허용하지 않는다. 진실은 알고리즘에 따라 쪼개지고, 각자 원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탈진실의 교훈은 사회 모든 문제에 대해 다양한 진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금과옥조처럼 믿는 진실도 공론장에서는 결국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다. 플라톤은 동굴 밖 태양 아래 진실이 있다고 했지만, 오늘날 탈진실 사회에서 진실은 어둠 속 동굴 안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다. 탈진실 사회에서 자신의 진실을 절대화하면 다른 사람의 진실과 반드시 충돌한다. 오늘날 좌우를 불문하고 번져가는 팬덤은 자기 진영의 사회적 진실을 절대화하는 집단 현상이다. 제대로 된 진실을 확보하려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양보하고 존중하며 소통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목소리 높인다고 해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법과 제도는 공정의 원리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자유민주주의의 공정은 기본적으로 다원성(plurality)을 전제한다. 이런 관점에서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언론 입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방송 3법 개정으로 공영방송(KBS, MBC, EBS) 지배구조가 바뀌었다. 노동조합은 사장 선임과 방송 운영에서 실질적 권한을 확보했다. 정치의 빈자리를 방송 구성원이 메우는 구도는 ‘변형된 후견주의’라 할 수 있다. 국민이 주인이라 하지만, 국민 모두가 실제로 공영방송의 주인이 될 길은 보이지 않는다. 다원적 가치를 어떻게 확보할지는 모호하다. 특별다수제 사장 선출안이 주목받지 못한 것은 아쉽다. 책임정치와 다원성을 실현할 절충안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언론중재법 개정안도 사정은 비슷하다. 고의·중과실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은 언론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 과거에도 입법 시도가 있었지만 무산된 전례가 있다. 지난주 이재명 대통령이 개정안에 반대 입장을 밝힌 것은 여권 내부에서 합의와 조정이 충분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방송통신위원회를 폐지하고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를 신설하는 개편안은 정치적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콘텐트 산업의 핵심인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업무는 빠졌다. 현 방통위 위원장을 겨냥했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이런 임의적 조직 개편은 제도 개혁의 공정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헌법 기본질서를 직접 훼손하지 않는 한 언론 자유를 폭넓게 인정한다. 진실 여부는 공론장에 맡기고 언론 자유를 최대한 보호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더 크게 확보한다고 본다. 가짜뉴스 폐해가 심각하다 해도 정부가 이를 직접 판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부 역시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경험은 권력의 정보 규제가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초래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탈진실 시대 언론 개혁은 다양한 사실과 관점의 소통을 넓히는 방향이어야 한다. 유튜브가 진실을 왜곡한다고 해서 억누르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다양한 사회적 진실이 공론장에서 유통되도록 하고, 객관적 사실과 합리적 근거가 거짓과 경쟁하도록 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찰이 필요하다. 여권이 추진하는 언론 입법은 탈진실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듯하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정치적 구호가 공정 가치를 앞서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상호 신뢰와 승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탈진실 시대의 ‘사회적’ 진실은 다원적으로 구성된다. 개인이나 집단이 믿는 사회적 진실은 결국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다. 언론 법제는 이러한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하는 다원성이 핵심 원리다. 각자 믿는 진실을 상대에게 관철하려 든다면 갈등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진실은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는 겸허한 인식이 있을 때 비로소 서로 다른 목소리를 존중할 수 있다. 그럴 때 국민 통합이 가능해지고 자유민주주의도 성숙할 수 있다.
손영준 국민대 미디어광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