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찬란한 문화 꽃 피웠던 고령 대가야 문명의 발자취를 찾아...

2024-09-21

지산동 고분군, 봉분(왕릉 포함) '우와!!' 감탄...1500년 넘는 시차 실감

대가야박물관, 철기와 토기문화로 융성했던 대가야의 역사를 한눈에 감상

정종(鄭種·1417∼76) 무과급제 교지 및 정충적개공신 교서 보물지정 '눈길'

대가야(大伽倻)는 경상북도 고령에 있었던 가야계 국가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首露王)과 함께 구지봉에서 태어난 6명의 동자 중에서 둘째인 이진아시(伊珍阿豉)가 건국했다. "대가야"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후기 가야연맹을 이끌기 시작하면서부터로 추정되는데 "대가야"라는 이름 자체는 가야연맹 전체의 국명으로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가락국(금관가야)도 사용했다. 우륵의 12곡의 상가라도가 이곳인데 상가라도의 명칭이 가야의 수도라는 의미로 이 시기에 반파국 중심의 대가야가 어중간하게나마 중앙집권화된 고대국가로 이행했음을 시사한다.

최근 대가야 궁성지로 추정되는 발굴 현장에서 대왕(大王)이라는 글자를 새긴 걸로 보이는 토기가 고령에서 발굴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금껏 '왕'에 관한 유물과 기록을 찾지 못해 답답했던 대가야의 당시 국력과 위세를 짐작케 한다. 상당수의 학자는 대가야가 단순한 연맹 국가가 아닌 신라나 고구려 같은 고대국가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핵심 유물로 보고 있다. 이는 대가야 왕도인 고령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된 명문이면서 이를 '大王'으로 읽을 때 대가야 궁성지의 실체에 대한 논란 여지를 잠재울 수 있으며, 근래에 제기되고 있는 대가야 고대국가론에 큰 힘이 실린다.

대가야의 도읍지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토기와 철기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운 곳으로 역사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고령. 경상북도 남부에 위치해 있는 고령의 대표적 유적지는 봉긋하게 솟아오른 둥글둥글한 무덤 능선이 모여 있는 지산동 고분군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곳은 대가야 시대의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고분의 규모와 구조를 통해 당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지산동 고분군은 가야고분군이 보유한 7개 지자체 가운데 가장 많은 700여기 봉분(왕릉 포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유산에 등재된 가야고분군의 57%, 전체 면적의 44%가 고령 지산동에 있어 대가야 수도로서의 역사적 면모를 갖추고 있는 곳이다.

◇ 지산동 고분군..700여기 봉분(왕릉 포함) '우와!!' 감탄! =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린 21일 오후 기자가 찾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 이곳은 주산 능선 위에 위치하고 있어 보는 사람들이 '우와!!'라는 감탄사를 자아내는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30분쯤 갔을까? 눈앞에 펼쳐진 고분군을 바라보면 1500여 년이 넘는 시차를 실감할 수 있다.

고분군은 대형 봉토분이 능선을 따라 군집을 이루며 구릉지와 일체화된 압도적인 경관을 보여준다. 큰 무덤을 구릉의 높고 탁월한 곳에 축조하고, 그 주변으로 작은 무덤을 배치해 차별화 한 것이 특징이다. 이승과 저승이 하나로 연결된다는 내세사상과 순장을 비롯한 장례문화, 탁월한 경관과 우수한 토목기술, 당시의 신분질서와 사회구조 등을 잘 보여준다. 특히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종류의 껴묻거리는 '대가야양식', '고령양식'으로 불리며, 대가야의 문화적 역량과 우수성을 증언한다.

이날 손자와 함께 고분군을 방문한 문영선 씨(부산 기장군)는 "정상까지 올라와 보니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라며 "부산에서 먼 곳이지만 옛 가야의 문화를 접할 수 있어 좋았고, 다음엔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오고 싶다"라고 말했다.

◇ 대가야고분전시관 = 지산동 고분군을 감상한 후 대가야박물관을 방문해 토기와 철기문화로 융성했던 대가야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지상의 고분군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속을 알 수 없어 답답했던 탐방객들은 전시관에서 그 내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산동 고분군의 토기는 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그릇받침, 뚜껑접시 등이 대표적이다. 대가야의 토기는 조형미가 뛰어나고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안정감을 가지고 있어, 고대 토기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지산동 고분군에선 고리자루 큰칼, 쇠창, 쇠화살촉 등 공격용 무기와 갑옷과 투구 등 방어용 무기가 출토됐다. 공격용 무기인 고리자루 큰칼은 손잡이와 고리에 용이나 봉황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는 장신구와 마찬가지로 신분 및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쇠창은 나무자루를 꽂아 사용했고, 화살촉은 다발로 묶여 있는 상태로 출토되기도 했다. 특히 방어용 무기인 갑옷과 투구는 가야지역과 일본지역에서 많이 출토된다. 갑옷은 판갑옷과 비늘갑옷이 있고, 투구도 형태가 다양하다. 대가야와 왜의 활발한 교류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 조선 초 무신 정종(鄭種·1417∼76) 무과급제 교지 및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 교서 보물지정 '눈길'

조선 초기 무신 정종(鄭種)은 기자의 16대 조상으로,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字)는 무부(畝夫), 호는 오로재(吾老齋),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정종은 1442년(세종 24년)에 무과에 급제했는데, 1450년(문종 즉위년)에 명나라 사신들이 보는 앞에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선보일 정도로 뛰어난 무예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군사적 지식도 해박해 하위지(河緯地)[1412~1456]·권남(權擥)[1416~1465]·홍윤성(洪允成)[1425~1475] 등과 함께 문종이 편찬한 '오위진법(五衛陣法)'을 교정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종은 1453년(단종 1) 11월 이징옥(李澄玉)의 난 때 종성절제사로서 이징옥을 포살(捕殺)한 공으로 군공(軍功) 1등에 책록되고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율원군(栗元君) 이종(李)의 휘하에서 총통군(銃筒軍)을 이끌고 출전,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됐으며, 행충무위상호군겸오위장(行忠武衛上護軍兼五衛將)에 임명되고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다. 당시 세조는 공을 세운 45명을 뽑아 3등으로 나눠 공신에 책록했는데, 1등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10명, 2등 정충포의적개공신(精忠布義敵愾功臣) 23명, 3등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 12명이었다.

정종은 출전(出戰)과 충청도절제사(忠淸道節制使)를 거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이르러 파직(罷職)과 정역(定役)을 겪으려 파란만장한 삶을 영위했다. 묘소는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장방동(長房洞)에 있다. 고령 덕곡면 반성리에 있는 반암서원(盤巖書院·여말선초 문신이었던 정구(鄭矩)로부터 아들인 정선경(鄭善卿), 손자인 정종(鄭種),정비(鄭秠)를 제향한 서원)에서 제향되고 있다.

베타뉴스 정하균 기자 (a1776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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