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 나선 사절단 태세 급변, 서양 문물 챙겨 귀국

2025-01-23

스핑크스의 사무라이들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았지만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입니다. 과거사 문제의 매듭도 양보할 수 없지만 상대를 더 잘 아는 일도 중요합니다. 일본의 근대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남긴 여행기와 일기, 문학작품을 통해 ‘현대 일본의 기원’인 일본 근대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살피는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편집자주〉

우등생의 빛과 그늘

서양 제국주의가 기세를 떨치던 19세기 후반의 시점에서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서양 대포의 위력에 굴복하여 국토의 전부 혹은 일부를 식민지로 내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궁금해한다. 왜 일본만이 식민지가 안 되었는가? 그들은 어떻게 해서 짧은 기간에 세계열강의 반열에 올랐는가?

조슈·사쓰마의 노선 전환

일본 근대사 가장 극적인 장면

1863년 사절단 박대당했지만

1871년 사절단 대규모 서양 학습

통역 합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수당 털어 지리·역사·경제서 구입

근대일본의 성공 서사는 오랫동안 동서를 막론하고 인구에 회자되었던 ‘근대화의 우등생’이라는 말로 수렴된다. 그야말로 자타공인이다. 그런데 곱씹어보면 이것은 당사자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칭찬일 수도 있다. 먼저 이 말에 배어있는 서양 우월주의를 승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디 학생의 학습능력이 우수한지 아닌지를 평가하고 가리는 일은 온전히 교사의 몫이다. 그럼 교사는 누구인가? 당연히 일본에 서양문명을 이식한 서구열강이다. 또 한가지 있다. ‘우등생’이라는 말이 반드시 긍정적인 맥락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주어진 일, 혹은 이미 문제가 설정되어 있는 과제는 높은 완성도로 수행하지만, 틀에서 벗어난 문제는 잘 풀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는 선입견이 엄존한다. 20세기 아날로그 시대의 제조 강국으로서 1980~90년대에는 미국을 위협할 정도였던 일본이 디지털 혁명의 급속한 진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30년의 장기침체에 빠진 원인을 ‘우등생의 함정’에서 찾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일본이 서양세력의 식민지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극동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이점에 더해 일본에 위협적이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이 때마침 각각 크리미아전쟁·보불전쟁·남북전쟁에 휘말리며 바깥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게 되었다는 ‘행운’도 뒤따랐다. 1853년 비록 공포탄이었지만 천지를 진동시키는 페리 함대의 무시무시한 대포 앞에 쇄국 노선을 포기한 에도 막부는 1854년 미국과 수호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에게 항구를 개방했다. 일본으로서 서양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을 벌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본 각지에서 불평등 조약을 맺은 막부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고, 강경파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외쳤다. 당황한 막부는 1862년과 1863년, 두 차례에 걸쳐 외교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했다. 1차 견구(遣歐)사절단은 지방 2개 항구와 도쿄·오사카의 개방연기, 2차 견구사절단은 공식명칭이 ‘요코하마 쇄항(鎖港) 담판 사절단’, 즉 이미 개항했던 요코하마의 폐쇄 교섭을 위해 파견되었다. 파리에 도착한 2차 사절단은 나폴레옹 3세를 알현, 방문 목적을 설명했지만 결과는 ‘낙장불입’이었다. 국제 외교무대에 처음 등장한 일본은 외국에 이미 약속한 개방을 유보하거나 취소하자고 호소하는 어설프고 미숙한 상대였다. 이런 수구적인 자세로만 보면 일본도 서양 세력의 압도적 무력에 굴복하여 반 강압적으로 불평등한 조약을 맺고 국토의 일부를 침탈당한 여느 아시아 약소국가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교차로에 선 사무라이들

진귀한 사진이 있다. 2차 사절단이 이집트 기자의 스핑크스상을 배경으로 찍은 단체 사진이다. 그런데 어딘지 기묘하다. 세계적인 유적 앞에서 찍는 단체 사진임에도 제대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람은 반도 안 된다. 석상 목 부분까지 올라가 앉아있거나 타고 온 노새에서 내리지도 않은 사람도 보인다. 원거리여서 인물들의 표정은 살필 수 없지만 어딘지 자신 없어 보이는 자세나 시선에서 피사체들의 위축되고 어정쩡해 하는 심리 상태가 전해지는 것 같다.

당시 이집트의 사막은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탐험의 땅에서 여행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관광객의 거의 대부분이 유럽의 상류계층이었다. 영국·프랑스 등지의 군인들도 단체로 찾았다. 그들은 피라미드를 발굴, 연구하여 이집트 고대유적의 신비를 밝혀낸 서구 근대문명의 후예들답게 낙타나 말 등에 앉은 채 등 뒤의 스핑크스상을 배경으로 득의만면한 미소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대항해시대 이래 이동하고 관찰하는 주체는 언제나 유럽인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가 과거를 해명하고 문명을 전파하며 현재와 미래를 추동하는 유일한 주체라는 확신과 함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그렇다면 이 사무라이들은 과연 어떤 관광객이었는가? 피라미드에 가기 위해 일행이 숙소에서 마차에 올랐을 때, 사절단은 자신들을 ‘구경’하러 몰려든 수백 명의 인파에 적잖이 시달려야 했다. 관광객으로서 사절단 일행은 분명히 ‘보는’ 주체였겠지만 그와 동시에 엄존했던 인종적·문명적 위계체계 속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에 쉽게 노출되는 상대적 약자이기도 했다. 사진 속의 사무라이 집단은 차림새로만 보면 중세에서 곧바로 튀어나왔음직 한 행색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사진이 어정쩡하게 보였던 가장 큰 이유는 사진 속 인물들이 과거에 묶인 채로 과거를 관찰하고 기념한다는 어색함 때문이지 않았을까. 본국 일본은 근대라고 하는 새로운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 문명의 폐허 앞에 선 사무라이들은 과거의 시간에서 서성거리는 국가의 명운을 뿌연 모래바람 속에서 막막하게 헤아릴 수밖에 없었다.

지면 배운다

이렇다 할 성과 없이 6개월 만에 일본에 돌아온 2차 사절단은 외교 교섭 실패를 이유로 막부로부터 면직되거나 근신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 빈손으로 귀국했을까? 사절단의 대표 이케다 나가오키(池田長発)는 당시 27세로 동서의 학문에 능해 막부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던 엘리트였고, 대표적인 양이론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곳곳을 다니면서 유럽 근대문명의 우월함에 압도당했다. 도중에 들렸던 중국과 이집트에서는 고색창연한 과거의 시간에 얽힌 채 서양세력 앞에 무기력하게 굴종하는 모습을 보았다.

프랑스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2차 사절단은 예정되어 있던 영국·네덜란드 방문을 취소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외교성과는 없었지만 마르세유에서 실은 그들의 짐 속에서는 공업·섬유·농업·물리학·생물학에 관한 서적과 측량도, 와인 양조법 같은 자료가 가득했다. 그리고 귀국 직후 이케다는 막부에 개국의 중요성을 진언했다. 양이파였던 젊은 엘리트가 개화파로 변신한 것이다.

이들보다 먼저 1차 견구사절단에 통번역 담당으로 합류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도 나라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서양 문명을 학습해서 서양을 따라잡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깨달은 인물이었다. 그는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그동안 아껴두었던 해외 도항 수당을 모두 털어서 지리·역사·경제 관련 서적을 구입했다. 이 책들이 ‘일본 근대 최대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토대가 되었다.

‘양행(洋行)’은 일본의 근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이다. 막부 말기인 1860년부터 186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외교사절단을 미국·유럽에 파견했다. 서둘러 근대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춰야 했던 메이지 정부도 출범 4년째인 1871년에 정부 내각의 핵심 장관을 다수 포함시킨 대규모 사절단을 미국과 유럽 11개국에 파견했다. 이 구미회람사절단이 탄 배에는 유학생이 60명이나 승선했다. 따라서 큰 맥락에서 보면 19세기 후반 일본이 사절단을 파견한 대외적 명분은 외교 교섭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서양의 근대 문명에 대한 학습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처럼 일본 근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사절단·유학생에 의한 인적 이동이다. 여기에는 국가 예산을 들여 서양에서 초빙한 전문가·학자도 포함된다.

아마도 일본의 근대화와 관련한 역사적 사건 중에 가장 극적인 장면은 일본 열도 남부의 강력한 세력들이 보여준 신속한 태세 전환이 아니었을까. 강경한 양이 노선의 본거지였던 조슈(長州)와 사쓰마(薩摩)가 영·불 해군을 상대로 포격전까지 벌였지만 현격한 힘의 차이만 확인하고 서양의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근대화 노선으로 전환한 것, 적국이었던 영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한 것이 그것이다. 이 역사의 한 단락은 ‘지면 배운다’ ‘명분보다는 실리를’이라는 덕목이 일본인들 사이에 집단 DNA처럼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윤상인=서강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에서 비교문학 전공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근대 이후 한·일 관계를 문학의 관점에서 살핀 『문학과 근대와 일본』을 썼고,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출간한 『세기말과 나쓰메 소세키(世紀末と漱石)』로 인문·사회과학 분야 아쿠타가와상으로 통하는 산토리 학예상을 받았다. 미시마 유키오의 장편소설 『봄눈』 등을 번역했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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