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존 시나, WWE 프로레슬러는 어떻게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었나

2025-12-19

한 시대가 끝났다. 지난 12월14일(한국시간) 세계 최대 프로레슬링 단체 WWE의 새터데이 나이트 메인 이벤트에서는 프로레슬러 존 시나의 은퇴 경기가 진행됐다. ‘마지막 순간은 바로 지금(the last time is here)’이라는 슬로건의 은퇴 투어를 선언하고 올 한 해 다양한 대립과 경기를 만들어온 그는, 마지막 상대가 된 군터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뒤, 자신의 운동화와 손목밴드를 링 중앙에 놓고 링 바닥에 입 맞추고 레슬러로서의 23년 여정을 마무리했다. 앞서 나는 한 시대가 끝났다는 표현을 썼다. 아마 딱히 여기에 이견이 있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당장 프로레슬링 전체 역사를 통틀어 헐크 호건,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 더 록과 함께 각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꼽히는 슈퍼스타인 동시에 이들을 통틀어서도 WWE라는 단체에 가장 꾸준히 헌신해온 그에게 WWE는 Greatest of all time이란 호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정말 한 시대가 끝난 건, 그저 업계 최고의 선수가 은퇴해서만이 아니다. 존 시나는 단체의 챔피언으로서 간판으로서 감당해야 할 무게의 상한선을 본인 이전과 이후를 가를 만큼 높였다. 존 시나의 시대가 끝난 이후의 질문은 그만큼 인기 있는 스타, 시청률과 굿즈 판매량을 책임지는 레슬러가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니다(물론 단체의 명운이 걸릴 만큼 중요하다). 진짜 질문은 시나처럼 부담의 무게를 견뎌내고 이겨내 쇼에서 말하는 서사와 가치를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게 만들 수 있느냐는 거다.

WWE 무대 뒤편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아낸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WWE: 언리얼>에서 과거 프로레슬링 슈퍼스타 트리플H이자 현 WWE 최고 콘텐츠 책임자인 폴 르벡은 현재 WWE 최강 선역 캐릭터를 맡고 있는 챔피언 코디 로즈에 대해 “그 자리는 이 업계에서 가장 어렵다”고 설명한다. “늘 옳은 일을 하고 시련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일은 까다로운” 일인데, 그걸 보는 이들이 “세상에 저런 영웅이 어딨어?”라 말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게 존 시나가 오랜 시간 감당해야 했던 일이다. 같은 다큐에서 WWE 직원은 코디가 여러 면에서 존 시나 역할을 물려받은 후계자라 설명한다. 심지어 이번 은퇴 투어 기간 동안 존 시나는 거의 20년 만의 악역 전환까지 하며 코디와 대립해 그를 단순한 챔피언이 아닌 자기 뒤를 이을 아이콘으로 만들기 위한 대관식까지 만들어줬다. 하지만 10년 전엔 로만 레인즈에게 그 역할이 부여됐고 그는 단체의 지속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결국 코디가 그 역할을 대체했다. 코디는 현재 챔피언에 오를 자질은 증명했지만 그 위치는 결승선이 아닌 출발선이다. 폴 르벡이 말한 바, 앞으로 이 업계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내야 하는 위치. 바른 생활 사나이를 연기하는 것은 쉽다. 각본을 통해 승리를 몰아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승리의 가치를 어떻게 믿게 할 것인가. 링 위에서 근육질 상반신을 드러내고 쫄쫄이 타이츠를 입고 뒹구는 남자들의 몸부림에서 어떻게 모두가 인정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영웅이 탄생할 수 있는가.

톱가이로서의 프로레슬러라는 것은 말하자면 한 사람이 록스타이자 슈퍼히어로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무대에서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퍼포머이며,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정의를 구현하는 강철 같은 도덕성을 갖춘 동시에, 자신이 소화해야 할 캐릭터와 서사를 현란한 마이크워크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다. 존 시나에게도 분명 재능이 있었지만 한계도 있었다. 잘생긴 호감형 백인 영웅을 연기할 얼굴과 근육질 몸을 갖췄지만 그 분야의 원형이라 할 헐크 호건만큼 기골이 장대하진 않았다. 키와 체중 대비 최고 수준의 근력으로 체중 200㎏에 달하는 빅쇼를 드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대에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고의 운동 능력을 지닌 브록 레스너가 있었다. 좋은 목소리와 발음, 수준급의 말솜씨가 있었지만 더 록 같은 유행어 제조기 수준은 아니었으며 한때 시나와 라이벌 구도를 이뤘던 CM펑크는 2011년 소위 파이프밤이라 불리는 각본과 현실의 경계를 부수는 화끈한 마이크워크로 WWE의 운영을 비난하며 역사에 남을 순간을 만들어냈다. 이적이나 불화 없이 23년간 단체를 위해 헌신했지만 WWE의 수호신 언더테이커는 30년간 링을 지켰다. 시나는 좋은 자질을 지녔고 단체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챔피언이 되었지만 딱 거기에서 멈출 수도 있었다. 운 좋은 스타와 아이콘 사이의 갈림길. 시나의 위대한 점은 재능으로 채울 수 없는 빈 부분을 자신의 삶 자체로 채웠다는 것이다. 링 위에서 아이들에게 비타민을 섭취하라고 말해주는 헐크 호건은 정작 현실에서 스테로이드 투여 혐의를 받았고 말년까지 사생활 문제가 많았지만, 시나는 깨끗한 사생활은 물론 불치병·난치병 어린이들을 위한 만남을 2016년 기준 500회를 채우며 자신이 말하는 바의 존재가 되고자 했다. 그는 브록 레스너나 골드버그 같은 괴물은 아니었지만 정작 레슬링에 대한 열정이 식은 그 둘이 레슬마니아 20에서 역사에 남을 졸전을 펼치고 링을 떠난 사이 엄청난 체력과 성실한 몸 관리로 WWE 특유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며 메인이벤터로서 책임을 다했다. 비속어를 적절히 사용하며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낸 더 록과 달리 바른 생활 사나이로서의 핸디캡을 안고 있던 시나는 그럼에도 지루하다는 관중 반응에 굴하지 않고 서사와 대립을 위해 필요한 독백이나 설전 모두를 높은 완성도로 완료했다. 30년 경력 거의 모든 순간 존중과 사랑을 받았던 언더테이커와 달리 시나는 상당 기간 무적 선역의 역반응으로 ‘시나는 재수 없다’는 야유를 들으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팬을 존중했다.

WWE 전 경영자였던 빈스 맥맨은 신인 시절 언더테이커에게 조언하며 ‘인식이 곧 현실’이라 말한 바 있다. 바로 그것이 쇼로서의 프로레슬링을 어느 순간 현실로 만들어내는 마법의 비밀이다. 대사와 갈등과 감정 모두 각본에 의해 짜인 것이라 해도, 그 각본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몰입하는 레슬러들의 열정과 헌신에 관중과 시청자가 이입하고 감동할 때, 그 각본은 현실이 된다. 슈퍼히어로 존 시나 역시 그러하다. 그가 말하는 충성, 헌신, 의지, 용기는 그저 대사이자 개념일 뿐이지만, 자기의 반평생을 링 안과 바깥에서 어린이를 위한 슈퍼히어로의 삶에 바친 시나에게서 대중이 영웅성을 인식할 때, 그 모든 개념들은 생생한 현실이 되고 시나는 하늘을 날지 못해도 현실의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다. 시나를 대표하는 캐치프레이즈인 ‘Never give up’도 마찬가지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은 말일 뿐이다. 누구든 할 수 있는 말이고 하나 마나 한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수백명의 희귀병 어린이들을 만나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링 안에서 만난 강적 앞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안티팬의 야유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 역할을 다한 시나의 지난 시간들은 ‘Never give up’이란 구호를 누군가의 현실로 만들었다.

아마도 현역인 군터의 경력과 위상을 위한 시나의 배려일 거라 해도, 시나의 은퇴 경기가 그냥 패배도 아닌 항복 선언을 통한 패배라는 것에 대해 많은 팬들이 WWE에 분노하는 건 그 때문이다. 몇년간 경영과 각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온 폴 르벡도 이날만큼은 온갖 욕을 먹어야 했다. 그저 기대를 배신한 결말이라서만은 아니다. 반쯤 홀가분한 듯 반쯤 체념한 듯한 표정에서 알 수 있듯, 시나의 항복 선언은 그동안 ‘Never give up’이란 말의 무게를 홀로 견뎌내야 했던 오랜 세월의 부담을 내려놓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이콘으로서의 위상을 지켜주는 엔딩은 아닐지언정 그가 짊어졌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작별 인사일 수는 있겠다. 다만 그가 내려놓은 뒤에도 ‘Never give up’이 다시 누군가의 현실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슈퍼히어로의 마지막을 전설로 남기는 대신 WWE는 존 시나의 시대와 그가 만든 현실을 종결했다. 그렇다면 다음 현실은 무엇일까. 아니, 그다음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부디 그럴 수 있길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한 시대가 끝났다. 그것이 곧 새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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