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었어요. 살려고 숨구멍을 찾아서 왔어요.”
트랜스젠더 남성 이진혁씨(25·가명)는 “죽는 게 너무 무섭지만, 죽음보다 삶이 더 무섭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두 손을 모아 잡은 이씨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미래가 두렵기만 하다. 이씨는 변희수재단 준비위원회(준비위)가 지난달 18일 긴급생활비 지원 대상으로 선정한 트랜스젠더 청년 8명 중 1명이다.
긴급생활비 지원 사업은 주거비·생활비·의료비·심리상담비 등을 지원해 이들이 경제·사회적 차별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다. 정부·민간을 통틀어 국내 트랜스젠더를 지원한 첫번째 사례다. 성별 정정으로 군에서 직위가 해제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싸우다 숨진 변희수 하사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트랜스젠더 청년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시작했다.
경향신문은 지난 2일과 6일, 12일 이들 가운데 3명을 서울 마포구에 있는 준비위 사무실에서 만났다. 가정과 학교, 일터와 사회에서 성 정체성으로 인해 차별받고 배제돼온 이들은 ‘살기 위해’ 재단의 문을 두드렸다고 입을 모았다.
이씨는 스물세 살이던 2022년 스스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정했다. 출생 시 지정받은 생물학적 성별은 여성이었지만 자신이 느끼는 정체성은 남성이었다. 차별·혐오가 두려워 정체성을 숨겨야 했다. 온라인에서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밝히고, 호르몬 치료를 받으며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유튜버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들이 ‘진짜 나’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 몸도 바뀌면 다른 사람들이 남자로 보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두려움은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찾아왔다. 커밍아웃(자발적 성 정체성 공개)을 들은 부모의 반응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거고, 너는 고립될 거다”였다. 부모로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나가 역할극을 하고, 진심을 담은 편지도 쓰면서 커밍아웃을 준비했다. 이씨는 갖은 노력에도 부모에게 ‘딸’로 남아야 했다.
구속이 시작됐다. 부모는 이씨 방을 뒤졌다. 알아챌 틈도 없이 성소수자 관련 책과 안내서가 사라졌다. 호르몬 치료를 위해 40만원을 들여 발급받은 병원 진단서도 없어졌다. 의료적 조치를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씨는 “밖을 나가는 것도 힘들었고, 침대에 멍하니 누워 죽음만 생각했다”며 “‘죽고 싶다’가 아니라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이제야 미래를 그릴 수 있는데, 그걸 잡고 싶은데, 자꾸 나를 놓게 만드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결국 집을 나왔다. 무작정 향한 외국의 공유주택은 좁고 더러웠다. 바퀴벌레가 나오는 집, 말이 통하지 않는 이웃들 사이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가장 심리적으로 안정됐다”고 했다. 한국에서 받지 못한 호르몬 치료도 받았다. 그는 “가끔 통화에서 부모님이 ‘목소리가 왜 낮아졌냐’고 물으면 ‘감기에 걸렸다’고 답했다”면서 “지금도 2년째 감기를 달고 사는 중”이라며 웃었다.
이씨는 한국에 돌아와 혼자 살고 있다. 일상의 차별은 달라진 게 없었다. 신분증에 남은 ‘여성의 기록’과 어렵게 얻어낸 ‘남성의 모습’은 곳곳에서 충돌했다. 병원 진료실에서, 구청 등 관공서에서, 부동산 사무실에서 이씨는 늘 긴장한다. “신분증이 제 모습과 달라 큰 소란이 나요. 아우팅(성적 지향의 비자발적 강제노출)이 될까봐 1분1초 긴장하게 되죠.”
이씨는 정신과에서 불안·공황장애 진단을 받고도 치료를 이어가지 못했다. 생계 때문이었다. 일자리를 찾으려 해도 신분증 속 성별이 문제가 됐다. 면접에서 남성인지, 여성인지 밝혀야 했다.
이씨는 심리치료 지원을 받기 위해 준비위를 찾았다. 그는 긴급지원금으로 “한고비를 넘겼다”며 “트랜스젠더를 위한 실제 지원이 이뤄지니 뭔가를 해볼 수 있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고 했다.
트랜스젠더 남성 박지학씨(21·가명)는 지난달 18일 준비위 지원금을 받아 한 달 치 심리상담 비용을 냈다. 생물학적 성과 성 정체성이 어긋날 때 오는 심리적 고통, 이 성별 불쾌감이 박씨에겐 공황장애·우울·불안장애로 나타났다.
불안은 2년 전 당한 아우팅에서 찾아왔다. 가장 믿고 친했던 친구 A씨에게 했던 커밍아웃은 “일시적인 감정일 뿐 트랜스젠더는 없다”는 답으로 돌아왔다. 충고를 가장한 폭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A씨는 “호르몬 치료나 성전환 수술을 해도 넌 XX염색체를 갖고 있다. 정신적으로 느낀다고 생물학적 남자가 되는 건 아니다”라며 이른바 ‘전환치료’를 독촉했다. 박씨에게는 정체성의 문제인데 A씨는 ‘질병’으로 받아들였다.
박씨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동아리와 대학교 커뮤니티에 퍼졌다. 박씨는 “괜히 말했다 싶어 자책했다”며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익명에 숨어 말을 옮기는 게 너무 무섭고 싫었다”고 했다. 견디다 못해 휴학계를 낸 후에도 상처가 따라다녔다. 처음엔 트랜스젠더 혐오 발언이라 넘기려 했지만, 여러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내가 잘못된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다들 내가 잘못됐다고 하니 자기혐오감이 심해졌어요.” 마음속에서 싹튼 자기혐오는 박씨를 조금씩 병들게 했다.
그는 대인기피·피해망상이 생겨 은둔하기 시작했다. 자책도 심해졌다. 박씨는 “제 또래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데 ‘왜 나는 평범하지 못할까’ 싶었다”며 “그러다 보니 자꾸 안 좋은 생각만 났다”고 했다.
그는 준비위 지원으로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트랜스젠더 당사자인 활동가들이 다른 트랜스젠더를 위해 도움을 준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로 다가왔다. 박씨는 “변희수 하사님도 그랬듯 호르몬 치료 후 아르바이트도 잘 안 구해지고 생계에 어려움이 있지만, ‘나 혼자’라는 고립감도 그만큼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고립감에서 벗어나야 할 많은 이들이 준비위의 존재를 알았으면 좋겠다”며 “준비위가 아니라 정식 재단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박씨는 대학 생활을 떠올리며 눈을 반짝였다. 도서관의 공기, 배움의 재미를 알 수 있었던 교수님의 강의가 그리워 그는 심리치료를 받고 다음 학기에 복학하기로 했다. “이 사업의 취지가 ‘다시 일어날 기회를 주자’는 거잖아요. 다시 일어나고 싶어요. 정면으로 마주치고 싶어요.” 재단의 지원으로 박씨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유성연씨(35·가명)는 올 초까지 자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내몰린 유씨에게 손 내민 이들이 그를 구했다. 교회 공동체와 준비위, 지인들이 지지했다. 변함없이 곁을 지킨 연인이 유씨를 부여잡았다. 유씨는 “준비위 지원을 신청할 때 세 분이 추천하는 글을 써주셨는데, 그때 내 삶이 지지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유씨는 3년 전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났다. 업무능력 부족, 회사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게 표면의 이유였지만 진짜 이유는 트랜스젠더라는 유씨의 성 정체성이었다.
유씨는 여성으로 합격했지만, 남성으로 취급받았다. 입사할 때 주민등록등본 등 회사가 요구하는 서류는 빠짐없이 제출했고, 채용 과정에서도 문제가 없었다. 입사 이후 대우가 달라졌다. 회사는 유씨를 여성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에서 배제했고, 회사 워크숍에선 남성 직원과 숙박하도록 했다. 상사는 유씨 업무를 다른 여성 직원에게 넘길 때 사정을 설명해야 하니, 그에게 커밍아웃을 하라고 강요했다.
이미 회사에선 “너 목소리가 왜 그래?”라거나 “성 정체성에 문제가 있나?”라는 말이 돌았다. 수습 기간을 마친 정직원이었지만, 유씨는 항의 한 번 못했다. 그는 “그때 내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이상한 존재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아예 나갈 것 같았다”고 했다. 그때 성별 정정과 성확정 수술을 결심했다. 마음을 먹고 나니, 돈이 급했다. 라면만 먹었다. 배달·속기·콜센터·제조업 공장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수술과 성별 정정을 마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버텼다”고 말했다.
성별 정정 뒤에도 현실은 그대로였다. 이 일 저 일을 전전하며 경력과 요건을 쌓지 못한 게 발목을 잡았지만, 그보다 더 큰 걸림돌은 실패의 두려움이었다. 우울·불안과 무기력, 떨칠 수 없는 자기 비하로 유씨는 의욕을 잃었다. 앞서 좌절을 겪은 이들이 그랬듯 유씨도 은둔을 시작했다. 유씨는 “그때 모든 것을 다 놓으려고 생각하고, 실제로 준비도 했다”며 “하지만 사실, 어느 때보다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시 시작할 기회를.’ 준비위가 건넨 말이 유씨의 삶에 ‘동아줄’이 됐다. 그는 지원금으로, 또 그의 삶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로 도전을 꿈꾸게 됐다. 영영 얘기할 기회가 없을 줄 알았던 ‘미래’와 ‘희망’도 입에 담게 됐다.
“지원금을 받았을 때 실낱같은 희망이 보인 느낌이었어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죠. ‘그래 할 수 있다’ ‘계속해보자’ ‘계속 살아가보자’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