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항상 피부를 맞대고 있는 가장 밀착된 물리 환경은 무엇일까. 혹자는 공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일부는 공기 중 가장 분포가 높은 질소 분자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모두 옳은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인지하지 못하지만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물리 환경으로 전파가 있다.
우리 일상의 생활 공간은 전파 신호와 그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각종 휴대폰, 와이파이에서 발생하는 통신 신호와 방송 신호, 위성에서 보내오는 다양한 신호들, 그리고 태양과 우주에서 날아드는 자연 발생 전파 등이다. 우리는 이들 전파의 바다 속에서 매일 헤엄치듯 밀착된 일상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러한 전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1895년 마르코니가 최초로 장거리 무선 송수신을 성공한 이래, 전파 연구는 전기전자 산업의 초창기부터 오랜 기간 지속적인 기술 혁신을 주도하며 오늘날 전자정보 시대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이러한 유구한 전통에 전파 연구자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전파 연구자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이 땅에 전파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힘써 왔다. 멀게는 방송 시스템, 최근에는 무선 통신 시스템이 이들 노력에 의해 안정적으로 구현됐다. 그렇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우리 전파 연구자들은 또 어떠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지난해 과학기술정통부가 발표한 제4차 전파진흥기본계획에 이런 기회가 잘 기술돼 있다. 무선 통신은 그 공간이 우주로 확장할 것이며 활용되는 스펙트럼도 서브테라헤르츠 대역으로 확대될 것이다. 레이다로 대표되는 전파 센싱과 전파 에너지의 무선 전송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며 전파 의료와 같은 전파 융합 분야도 숙련된 전파 연구자들의 손길을 기다릴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주요 민간 응용과 함께 국방 응용도 전파 연구자의 큰 책무라고 생각한다. 최근 세계 여러 곳의 국지적 충돌은 여러모로 불행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기술적 측면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전자기전(戰)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중동 지역 분쟁에서 보여지는 이스라엘과 주변국 간의 극심한 전력 비대칭은 결국 공중에서의 전파환경 장악 능력의 격차에서 비롯된다. 아이언돔으로 대표되는 대공 방어 시스템의 핵심에는 위험 비행체의 탐지와 요격에 사용되는 정밀 레이다가 있다. 러·우 분쟁에서 두드러지는 드론의 경우에도 운항 및 무력화에 있어 전파 기술의 활용이 필수적이다.
잠깐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최신 기술이던 레이다에 있어 연합군은 마그네트론을 신호원으로 사용한 반면 주축군은 클라이스트론을 사용했다. 이때 탑재된 마그네트론의 성능이 클라이스트론을 능가했는데, 이로 인한 레이다 전력의 우세가 궁극적으로 연합군의 승리로 귀결됐다는 시각이 있다.
이와 같이 전파 연구자들은 우리 사회의 융성과 안위에 있어 앞으로도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필요한 미래 전파 인력의 양성은 여러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의 미래 세대는 근시안적 교육 정책 결과로 탁월한 수학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됐다. 일례로 전파 이론의 근간이 되는 맥스웰 방정식은 3차원 기하 공간의 벡터에 대한 미적분 형태로 구성된다. 이들 핵심 개념이 심화수학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2028년부터 수능에서 배제된다. 초급 미적분은 예외라고 하나 공학에서는 절대 부족하다. 추후 대학 강의실에서 전파 이론을 마주친 이들의 처지는 기초훈련 없이 전선에 배치된 병사와 다를 바 없다.
주변 국가의 도전도 거세다. 특히 중국의 기세가 대단하다. 주요 논문지와 학술대회는 중국에서 투고되는 논문으로 넘쳐나고 있다. 논문의 수준도 높다. 그리고 연구진이 두텁다. 필자의 연구분야는 우리나라의 경우 한 대학에 많아야 교수 서너명 수준인데 중국의 경우 흔히 수십명에 달하고 그런 대학의 수효 또한 많다. 중과부적의 부담이다.
이러한 도전에도 우리 전파 연구자들은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오늘도 묵묵히 맡은 일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이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어느때 보다도 절실하다.
이재성 한국전자파학회 회장·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jsrih@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