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 백주희 신작 ‘당신을 배송합니다’
코로나19 기간 중 2년간 새벽 배송
“내 경험과 세상 인식을 안무로 풀어내”
무용수들은 쉴 새 없이 달린다. 제자리에서 뛰든 무대를 가로지르든 거의 쉬지 않는다. 때로 헐떡이며 지쳐 보이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움직여 흥겨워 보일 때도 있다. 관객이 발을 구르고 싶을 정도다.
분명한 건 이들이 시간에 쫓긴다는 사실이다. 무언가에 추격당하는 것처럼 뒤를 흘깃 돌아볼 때도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사업인 제17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된 <당신을 배송합니다>가 지난 4, 5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작품은 창무회 수석단원인 안무가 백주희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백주희는 코로나19 기간 동안 약 2년간 새벽 배송 노동자로 지냈다. 생계였던 학생 레슨을 못하고 무대에도 설 수 없어 시작한 일이었다.
평생 무용가·안무가로 살다가 손에 익지 않은 택배노동을 한다는데 두려움이 없을 수 없었다. 장마철에도 폭설에도 택배는 계속해야 했다. 몇 번 넘어져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새벽에 우리 집 대문은 잠겨 있으니, 열려 있는 옆집으로 들어와 담을 넘어 배송해주세요’ 같은 요구사항도 있었다. 게다가 택배노동자 중 여성은 10명에 1명꼴이었다. 새벽에 여성 홀로 배송을 한다는 건 여러 가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했다. 백주희는 인터뷰에서 “‘돈 줬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배송해달라’는 인식이 있었다”며 “내 경험과 세상의 인식을 안무로 풀어내 확장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배송노동의 움직임을 안무에 적용했고 상품 바코드 찍는 소리를 음악 비트로 활용하기도 했다. 무대 전체를 이동형 짐차(롤테이너)처럼 꾸몄다. 무용수가 짐을 옮기는 동작이 다수지만, 종종 다른 무용수를 짐처럼 들어 옮기기도 한다. 번쩍 들려서 옮겨지기도 하고, 한쪽 팔로 질질 끌려가기도 한다. 백주희는 “배송 중인 물건이 구매자 자신이라면, 배송노동자가 물건이 아닌 구매자를 배송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작품 제목이 ‘당신을 배송합니다’인 이유다.
<당신을 배송합니다>가 택배노동의 열악한 현실을 직접 고발하는 작품은 아니다. 작품 배경을 모르고 본다면 리듬감 있는 추상적 안무작으로 볼 수도 있다. 백주희는 “너무 진지하게 접근해 관객에게 심적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며 “빠른 시간 안에 배송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유쾌하게 그릴 수도 있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작품이 일종의 블랙 코미디처럼 보이는 이유다.
백주희는 “일상에서 배송노동자는 가장 자주 마주치는 사람 중 하나”라며 “작품을 보고 나서 그들과 우연히 마주칠 때 작은 눈인사와 수고한다는 인사를 건넨다면, 그들은 충분한 힘을 얻어 열심히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