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 자란 곳에서 ‘외국인’이자 ‘성소수자’로…“차별금지법 ‘나중에’는 극우에 자리 내주는 일”

2025-05-19

혼인평등을 위한 동성혼 법제화 캠페인 단체 ‘모두의 결혼’ 활동가 송이원이 인터뷰 중 신분증 2개를 내밀어 보였다. ‘중화민국’이라 적힌 녹색 신분증은 대만 여권이다. 송이원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대만 국적 화교 3세다. 이 여권은 대만에서 100% 인정받지 못한다. 한국으로 치면 주민등록 번호가 없다. 대만 여권이지만 대만과 무비자 협정을 맺은 국가로 갈 때도 비자를 따로 받아야 한다. 이 여권으로 중국에 갈 수도 없다.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라 쓰인 파란색 여행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중국에 갈 때면 ‘여행객’으로만 인정받는 셈이다. 2012년 (한국) 영주권을 받기 전까지 신분증이 하나 더 필요했다.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거주 허가증(F2)이다. 영주권을 받고도 ‘외국인등록증’ 형태의 신분증을 사용한다. 예나 지금이나 3개의 신분증을 지니고 다녀야 한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한국, 중국, 대만의 3개 신분증 — 송이원은 “한국, 중국, 대만 3개 국가와 모종의 이상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3개국 어디에도 제대로 속해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뭔가를 계속 신청하고 어떤 걸 계속 등록해야 하는 삶의 연속을 산 거 같아요.” 서러운 일도 겪었다. 2012년 거주 비자 만료부터 영주권 발급 시점까지 한 달 정도 되는 행정 공백 기간 중 통신사에서 체류 기간 만료로 통신사용을 중단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다. “모국으로 여기는 곳에서 미등록 상태가 되자 참 서러웠어요. 이런 경험들이 있다 보니 지난해 산재로 숨진 미등록 몽골계 노동자 강태완님 소식을 접했을 때 마음이 많이 안 좋았어요. 유년기부터 자라고 일해온 곳에서 평생 외국인으로서 살아야 했고, 심지어 외국인으로 떠나셨어야 하니까요.”

이름은 ‘기쁠 이(怡)’에 ‘아름다운돌 민(玟)’자를 쓴다. 중국어 발음은 송이원이다. 영문으로 옮기면, SONG YI WON, 한자 독음을 한국어로 옮기면 송이민이 된다. 각각의 발음이 혼재됐다. ‘YI’와 ‘WON’ 사이 붙임표(-)가 붙기도 한다. “전산상 이름이 통일 안 되니까 본인 인증에 실패하는 때가 많은 거죠. ‘내 한평생이 왜 자기 증명이냐’ 했죠. 외국인들은 다 그럴 거예요.” 송이원은 “지금 당장 눈앞에 박해를 피해서 오신 분들에게는 무례할 수 있는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화교 친구들이랑 농담조로 ‘우리 뭐 준난민이지’ 같은 이야기도 한다”고 말했다.

배제와 차별도 겪었다. 연극 연출가 때 당한 일을 잊지 못한다. 10년간 연출가로 살았다. 성소수자 문제나 노동 문제 등 사회적 주제를 다뤘다. 국립극단 공연 연출도 맡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두산아트센터의 두산연강예술상 후보로도 거론됐다. “심사위원과 잘 알던 예술계 인사 한 분한테 ‘국적만 아니었으면 네가 받을 건데’는 말을 전해 들었어요. 홈페이지 지원 자격을 보니 ‘대한민국 국적자’라고 명시가 되어 있더라고요.” 직전에는 신진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인 두산 아트랩에도 뽑혀 공연까지 올렸다. 지원 자격을 두고 국적 관련 별도 규정이 없던 이 프로그램도 송이원이 공연을 올린 이후 지원 자격을 대한민국 국적자로 정했다고 한다. 송이원은 “몇 년 뒤 센터 두산연강예술상 담당자로부터 ‘아직도 대만 국적인가’를 묻는 전화가 왔다. 다시 수상자로 거론됐는데 여전히 한국 국적이 아니라 그 상의 자격 요건이 안 됐던 거다. 그 통화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커리어를 바꾸고 새 삶을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면 ‘대만 국적 화교’라는 존재를 고민하게 된다. 화교 역사도, 송이원의 가족사도 복잡하다. 증조부모와 조부모 세대는 1920~30년대 지금 중국 영토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 중화민국이 베이징에 수도를 두고 있을 때다. “한국에서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에는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어떻게 보면 나라가 이사를 했달까요. 저희 집안은 대만 땅을 밟아보지 않고 대만 국적을 가지게 된 거예요. 3대째 한국에서 사는데, 그 국적이 대물림되고 있고요.”

이념 문제도 다단하다. 부모와 조부모 세대는 대체로 ‘반공’ 세대로 살아왔다. 이 세대는 화교 학교에서 “돼지 잡고, 털을 뽑다(殺猪拔毛, 살저발모)”와 중국어로는 발음이 같은 “주더를 죽이고, 마오쩌둥을 없애버리자(殺朱拔毛, 살주발모)” 같은 표어를 배우며 다녔다. 많은 장년층 한국 화교들은 ‘중화민국’ 정체성을 지운 ‘대만 독립운동’도 반대한다. “어떻게 보면, 대만 독립은 그들로선 뿌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중국을 되찾아야 한다고 여기며 사신다”고 했다.

송이원은 티베트 탄압이나 홍콩과 대만의 사회운동 억압 같은 중국 정부 문제를 비판한다. 그는 “친구들 중엔 중국이나 홍콩, 대만 등지에서 사회운동을 하다가 안전 문제로 더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어 한국이나 다른 나라로 계속 이주하며 사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송이원은 “중국 공안의 감시 대상이 될까봐 무섭다”고도 했다. “저야 뭐 이렇게 그냥 지나가는 한 사람이고 그렇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딱히 저에 대해서 관리를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중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 늘 무서운 건 있죠.”

윤석열 정권 등장 이후 더 거세진 극우 세력은 친중인지, 반중인지 따지지 않는다. 송이원처럼 중국에 비판적인지도 묻지 않는다. 국가, 정부, 이주민을 구분하지 않는다.

‘화교’는 ‘외국에 정착해 사는 중국 사람’을 뜻한다. 한국에선 주로 대만 국적 중국인을 가리켜온 말이다. 극우 세력은 ‘반공’을 내세우면서도 반공 성향의 화교까지 싸잡아 공격한다. 중국 정부에 쫓겨난 이들도 혐오 대상이다. 윤석열 파면 뒤에도 ‘혐중 시위’가 이어졌다. 송이원은 “한국에 살면서 화교라는 말을 이렇게 자주 듣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화교가 노골적인 혐오와 배제·차별 대상으로 부각된 것도 처음이다.

송이원은 서울 광화문, 한강진 등지에서 벌어진 윤석열 탄핵 집회에 자주 나갔다. “극우 쪽 사람들이 ‘신분증을 보여달라’며 중국인인지 신분 확인을 하겠다고 나서는 일들도 있었다고 해요. 아무 행인이나 붙잡고 ‘빨갱이’,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송이원은 “공산주의가 유효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를 걱정하며 나라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트리고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게 터무니 없다”고 했다. 터무니없는 일이 잠잠해지지 않았다. 윤석열 파면 뒤에도 혐중 시위가 이어졌다. 송이원은 “예전엔 편견으로 ‘중국인들은 시끄럽다, 더럽다’ 같은 낙인을 찍었는데, 요즘은 특정 국적이나 이주민 정체성 자체를 문제 삼는 식으로 혐오의 대상이 광범해지고, 혐오 강도도 세졌다. 지금 혐중은 논리도, 근거도 없다. 혐오를 위해 만든 명분일 뿐”이라고 했다. “공산세력에 맞서는 ‘대통령님’, ‘각하’를 지켜야 한다거나 우상화하던 현상을 생각해보면, 일당 독재 중국 공산당보다 더 독재지향적이고 파쇼적인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문제라면 중국과 동아시아 민중들과 연대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죠.”

이주민 차별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극우 세력이나 문화예술계 일각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다. 윤석열 탄핵 집회 참여 시민들은 ‘윤석열 정권이 문제’라는 인식은 공유했다. 광장은 서로 연대하고 배우는 평등시민들의 장이기도 했다. 송이원은 부분적으로는 그 비판과 저항 너머 가치로 가지는 못했다고 본다.

“한 푸드 트럭은 ‘이 음식은 한국의 민주시민들을 위한 것’이라면서 외국인에겐 제공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었죠.” 탄핵 집회는 미얀마 이주민, 북유럽 국적 시민 등 여러 외국인, 이주민이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당시 광장은 탄핵을 두고 다투는 한국의 정치적인 공간인 동시에, 민주주의라는 보편 가치를 두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싸우며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공간이었는데, 이 집회는 한국인만을 위한 것, 탄핵만을 위한 것이라고 여기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고,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송이원이 강조하는 건 평등과 다양성이다. 광장에 나온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외국인 유학생이 바라는 민주주의와 세상에 관한 이야기가 논점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평등과 다양성, 민주주의 가치를 더 풍부하게 만드리라고 본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른 삶과 의견, 가치와 지향 이런 것들에는 기꺼이 이 광장 안에서 서로서로 휘말리면서 좋은 영향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주민’이라는 자기 정체성과도 이어지는 문제다. 송이원은 자신을 ‘이주하는 존재’로 여긴다.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주했다. 서울에선 월세 보증금 같은 조건에 맞춰 늘 옮겨 다녔다. “인간들은 자발적인 이유와 비자발적인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늘 이주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때그때 열심히 어디에서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는 정말 멋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다들 집을 떠나고 다시 새 집을 만들어가면서 살아왔고 살아가죠. 그 당연한 일들에 어떤 이유를 붙이고, 차별 근거로 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외국인’이란 말을 두고도 이렇게 말했다. “국내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한 말 같아요. 언젠가는 이곳에서 나가야 할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죠”라고 했다. 귀화는 하지 않았다. “20대 때는 국민 국가에 속하지 못하거나 경계에 있는 난민이나 이주민 같은 사람들이 고생하는데, 국민국가라는 제도를 최대한 거부하면서, 이 문제를 위해 싸우거나 하는 나를 깨어 있도록 하자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귀화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제 생애주기를 어느 정도 장기적으로 계획하고 싶고 전세 대출을 받고 싶기 때문에요. 진짜 월세 내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요.” 그는 “3대째 한국에 산 사람인데도 귀화 신청이 통과될까 걱정할 때가 있다. 나도 지금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라, 귀화가 잘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럴 정도로 벽이 높다”고 말했다.

송이원은 성소수자다. “‘차별하면 안 된다’는 건 당연한데, ‘거기에 성소수자는 들어가면 안 돼’라는 이야기는 이제 익숙해졌어요. 익숙해져서는 안 되지만 마음의 안정을 위해 극우세력이 그런 말들을 하면 일단 그 터무니없음을 웃어넘기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 선동돼 저런 논리를 내세우면 ‘진짜 나는 거부당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차별금지법 미제정은 극우세력에 자리 내어주는 일

대안 하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다. 극우세력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계속 반대해왔다. 민주당 등은 제정에 소극적이거나 언급 자체를 꺼린다. “(민주당 등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하지 않는 건 극우세력 문제에 눈 감으면서 계속 어떤 자리를 주는 겁니다. (대선 기간) 한국 사회가 차별금지법 제정이나 성소수자 혐오 철폐가 ‘필요하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합니다.” 송이원은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는 네 글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번 광장에서도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원했다. 시시비비를 가릴 게 아니라 제정해야 한다는 건 이미 확인됐다”고 했다.

송이원에게 한국은 나고 자란 곳이자, 차별을 경험하는 공간이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곳으로, 다양성과 인권을 보장하는 곳으로 바꾸려고 계속 함께 싸워나가는 투쟁 공간이기도 하다. 투표권, 선거권은 제한적이지만 태어난 땅에서 정치적인 존재로 살아가려 집회 참여도, 사회운동도 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분명 한국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송이원 인터뷰 뒤 성소수자와 혐중, 차별금지법 등에 관한 답변을 추가로 보내왔다. 내용을 그대로 전한다.

■외국인이자 성소수자가 보는 차별금지법과 혼인평등에 관한 의견

“저는,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늘 이주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제게 주어진 국가·민족적 정체성의 언어들과 관련하여 생각해보자면, 역설적으로 저는 한국이라는 국가, 영토의 범위를 벗어난 적 없이 머무는 사람이고 또 머물려는 사람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 바깥으로부터 ‘이주’를 한 적은 없으니 ‘이주민’이라기엔 애매하고 그냥 나라 안에 있는데 늘 나라 바깥에 그 자리가 할당된 ‘외국인’인 것이죠.

저는 성소수자로서도, 또 많은 성소수자 시민도 자주 이런 ‘자리’에 처한 자신을 느낍니다. 분명 같은 사회구성원인데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없다’, ‘당신이 겪었거나 당면하고 있는 차별은 지금 당장의 급선무가 아니다, 또는 그것이 차별과 혐오라는 것을 인정하여 당신에게 안전장치를 제공하고 시정하는 데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등등, 외국인이기 때문에,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같은 뭐뭐이기 때문에 ’늘 이등시민 같은 자리에 그렇게 있어라‘, ‘기다려라’, ‘나중에’ 같은 메시지를 사회로부터 또 국가와 정부로부터 계속 받는 것이죠. 삶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미래가 계속 닥쳐오고 있는데 그 ‘나중’이 언제이며 그 막연하고 불분명한 ‘나중’을 가지고 어떻게 삶을 살고 계획해나가야 할까요.

제가 공연계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내가 어떻게 해도 나는 다른 잣대를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어떤 장벽에 가로막혀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이 들며 차라리 앞으로의 삶에서 지난 시간을 지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힘들고 마음 아픈 결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떠납니다. 자신의 배우자와 가족이 되기 위해, 차별과 혐오와 폭력을 견디기 힘들어서, 그림자 내지는 없는 사람 취급받는 게 싫어서, 미래가 그려지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아서 많은 성소수자들이 이곳을 떠나고 있습니다. 동성혼이 법제화된 곳으로,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인 곳으로, 그래서 혐오와 폭력의 위험 가운데 사는 것이 아닌 보다 나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또 어딘가 등등으로….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한국에서 견디며 사는 것보다 다른 힘듦을 감수하고 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죠. 제가 아끼는 사람은 한국 국적이고 최근 몇 년간 외국에서 공부하고 일하였는데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야 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자신에게 “익숙한 지옥 같다”는 말을 하기도 하더군요. 저는 정말 사람들이 비자발적인 이유로 떠나지 말았으면 합니다. 또 머물더라도 견디고 버티는 삶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삶을 삶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해서 이곳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고 사회운동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나마 해보자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 혐중과 차별금지법

“최근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이 ‘우리 동네 혐오 현수막 제보해주세요’라는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정선거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중국인과 외국인, 이주민을 혐오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는 게 참 불편하고 걱정되었는데, 반가웠고 좋은 캠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찾아보니 홍보물에 “인종차별·성차별 등 인권침해 현수막은 법 위반!”이라고 적어두었더군요. 저는 “인종차별·성차별 등”의 “등”이라는 말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동성혼이 나라 망친다’, ‘아들딸들아 탈동성애하고 돌아와라’, ‘차별금지법의 피해자는 우리 아이들’ 등등의 혐오 현수막도 저 “등” 안에 포함될 수 있을까 하면서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이 좋은 캠페인임에도 불구하고 화교이자 성소수자로서, 또 성소수자가 계속 지워지는 지금의 한국 정치 맥락에서 양가적이고 복합적인 마음이 들어서랄까요. 인간은 너무나도 여러 가지로 구성된 존재이고, 차별 또한 복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혐오의 내용을 담은 현수막이 철거되면 좋은 것이고, 부당한 차별을 당한 사람이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그것이 재발하지 않는 환경이 조성되면 좋겠습니다. 해당 캠페인이 시민들로부터 혐오 현수막의 데이터를 수집하며 지역이 되었든 혐오표현의 양상이 되었든 어떤 문제를 진단함으로써 추후 방지책을 찾고 사회적이거나 제도적인 대화를 시도하며 해결을 도모해볼 수 있는 것처럼, 포괄적 차별금지도 여러 소수자들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서 기댈 수 있는 것이고, 또 지금까지 제대로 데이터화되지 못하였던 일상의 여러 복합적인 차별 사례들을 우리 사회가 확인하고 대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더욱 평등하고 모두가 존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어떤 문제들이 어떻게 발생하고 있나를 확인하고 고쳐나갈 수 있겠지요.”

▼ 김종목 기자 jomo@khan.kr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