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잡아먹는 배터리

2024-07-08

영어 단어 ‘배터리’는 포병부대나 요새화된 포대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배터리의 의미는 전지(電池)다. 이 용법은 18세기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전기를 모으기 위해 고안된 라이덴 병을 연결한 것을 대포들이 모여 있는 모습(배터리)에 비유하면서 시작됐다. 오늘날 일상 곳곳에 쓰이는 배터리는 그 어원처럼 군대나 전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례로, 과거 한국 전기산업을 석권한 굴지의 기업 로케트전지(구 호남전기공업)는 해방 이후 미군이 버린 군용전지를 재활용해 건전지를 만들었고, 이후 미군 및 국군에 군용전지를 납품하며 크게 성장했다.

에스코넥(구 삼영코넥)은 1998년 휴대폰 부품제조업체로 시작해 삼성전자 협력업체로 성장했다. 2015년부터 전지사업을 추진해 2017년 방위사업청과 75억원 규모의 리튬1차전지 납품계약을 맺었다. 2020년 설립된 아리셀은 에스코넥 계열사로, 31명의 사상자가 난 화성 공장 화재로 알려졌다. 아리셀은 군과 대기업에 리튬1차전지를 납품하고 있는데 참사 당시 보관하던 리튬전지 완제품 3만5000개 중 군 납품용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군은 1990년대부터 리튬전지를 사용했고, 비축된 리튬전지 폭발 및 화재 사고가 빈발했다. 2020년 국방부는 사고 예방을 위해 리튬전지 보관창고에 항온항습기와 열화상카메라를 설치했지만, 2021년 1월에서 2023년 9월 사이 폭발 사고가 31건 있었다. 위험성이 지적됐지만 군은 전지 소재 변경을 미루어 왔다. 안전성 검사나 협력업체 관리감독도 뒷전이다. 더욱이 아리셀의 리튬전지가 우크라이나에서 운용되는 살상용 드론에도 사용된다고 알려졌다. 리튬전지를 매개로 군 장병과 노동자, 러-우 전쟁이 연결되어 있다.

전쟁과 안보를 떠받치는 것은 징병제와 더불어 위계화된 노동시장 구조다. 참사로 숨진 23명 중 20명이 사내하청업체 메이셀 소속 일용직 파견노동자였다. 에스코넥은 인력관리를 위해 노동력을 공급하는 전문 자회사로 메이셀을 두었지만, 정작 법인 등기상 직업소개업체나 파견업체가 아닌 1차전지 제조업체로 등록했다. 주소지는 아리셀 공장 2층이다.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은 파견 허용이 안 되기에 불법파견을 피하고자 사내하도급업체로 위장한 것으로 보인다. 아리셀만이 아닌 모기업 에스코넥도 동일한 방식으로 불법파견이 이뤄졌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아리셀은 2021~2023년 산업안전보건공단 위험성평가 인정심사를 통과해 3년 연속 우수사업장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인력관리를 아리셀이 책임지지 않는 구조에서 위험성평가와 안전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리 없다. 참사 이틀 전에도 화재가 있었다. 아리셀은 참사 당일 공장 내 이주노동자의 인적사항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언어접근성 미비와 불안정고용에 놓인 이주노동자들에게 건물 내부 구조는 낯설었고 안전교육도 없었다. 희생자 23명 중 중국인 17명, 라오스인 1명, 여성 17명이라는 숫자는 위험의 이주화 및 여성화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갈 사람이 없어 이주민과 여성이 소위 3D 업종, ‘기피 일자리’에 몰린다고 말하지 말자. 위험하고 싼값으로 사람을 부리는 일자리 존재가 문제다. 이 문제 해결을 한국사회가 기피해, 사람 잡아먹는 일자리가 이주민과 여성에게 달려드는 거다. ‘하얀 석유’라 불리는 리튬 관련 영세업체만 경기도에 수천 개다. 에스코넥은 베트남과 중국 현지에 공장도 운영한다.

화성시청은 유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추모제를 막았다. 이태원 참사처럼 위패와 영정 없는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참사 발생 11일이 돼서야 영정과 위패가 놓였다. 희생자들을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하길 기피하는 것이다. 안보와 전쟁, 위험과 착취가 사람을 잡아먹고 애도마저 부정되는 이런 세계에서, 우리가 바라는 ‘안전’이란 무엇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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