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Petro)에서 전기(Electro)까지. 에너지는 경제와 산업, 국제 정세와 기후변화 대응을 파악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조양준의 페트로-일렉트로] 구독을 통해 에너지로 이해하는 투자 정보를 만나보세요.

‘석유국(Petro-state)과 전기국(Electro-state) 간의 대결’
미국과 중국이 벌이고 있는 패권 다툼을 에너지 측면에서 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펴고 있죠. 반면 중국은 전기를 중심 에너지로 육성하는 대표적인 국가입니다. 세계에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국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일까요? 실제로 중국에서 판매되는 신차 가운데 전기차 비중은 지난해(1~11월 기준) 40.3%로 2021년 13.3%에 비해 크게 늘었는데요. 전기차가 세계적으로 캐즘(일시적 수요 부진)에 돌입한 것이 무색할 정도인데, 이는 중국의 전동화(Electrification) 수준을 잘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문명의 충돌’처럼, 세계에서 가장 힘 센 두 나라가 에너지 충돌을 일으키는 형국입니다.
시진핑 “석유 생산 줄여라"
중국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 그 중에서도 핵심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최근에 열렸죠.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는 이번 전인대에 제출한 연례 보고서를 통해 “석유 제품 생산을 줄이고 대신 석유 화학 제품의 생산을 늘리겠다”고 밝혔습니다. 한 마디로 중국 정유업체들에 석유 생산을 줄이라고 지시한 겁니다. 이유는 자국의 석유 수요가 꺾였다는 것인데요.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중국 최대 석유 기업인 중국석유화학공사(시노펙)의 마용성 회장은 최근 “중국의 디젤 수요가 2019년에 정점을 찍었고, 2023년에는 휘발유 수요가 피크에 도달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중국 내 전기차 비중이 높아지고 있으니 디젤, 휘발유 수요는 앞으로 계속 내리막길을 걸을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입니다. 실제로 중국 원유 수입량은 지난해 5억 5340만 톤으로 1년 전 대비 1.9% 감소했는데요. 중국 원유 수입이 감소한 것은 경제가 잠시 멈췄던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고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연료 수요가 꺾인 것은 수년 째 이어지고 있는 부동산 불황을 원인으로 하는 중국 내수 둔화도 영향이 크겠죠. 그러나 근본 원인은 중국에서 에너지 전환이 본격화했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석유의 빈자리는 무엇이 채울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중국은 글로벌 재생에너지 산업의 선두 주자죠.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3년 현재 중국의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 규모는 1500GW로, 전 세계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 규모의 약 40%를 차지합니다. 단지 영토가 넓다는 이유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이죠. 설비 설치 규모가 워낙 막대하다 보니 중국 내에서도 공급 과잉 문제가 큰 실정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중국은 국가적으로 청정에너지 드라이브를 걸고 있습니다. 이번 전인대에서도 국가발전개혁위원회는 신규 해상풍력 발전 단지를 개발하고 티베트 등 광대한 사막 지역에 걸쳐 새로운 에너지 기지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최다 탄소 배출국에서 최대 청정에너지 국가로,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피봇’을 서두르는 중국의 전동화 전략은 속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석유 공급 확대 속도전
트럼프의 미국이 글로벌 석유·가스 지배력 강화에 나섰다는 점은 지난 회를 통해 전해 드렸죠.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에서 출발한 미국 석유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시도로 보입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라는 무기를 전방위로, 때로는 변칙적으로 휘두르며 그야말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극대화하고 있죠. 그런 트럼프 행정부라도 에너지에 대한 접근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바로 공급 확대, 이를 통한 가격 하락 유도입니다.
지난주 석유수출국(OPEC)과 러시아 등 비(非) OPEC 산유국으로 구성된 OPEC+는 감산 완화에 나섰는데요. OPEC+는 당시 미국이 고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 인상 속도전을 펼치자 ‘글로벌 경기 침체가 우려된다’며 2022년 8월부터 하루에 585만 배럴의 원유를 덜 생산하는 방식으로 생산량을 조절해왔는데요. 그런데 다음 달 1일부터 하루에 생산되는 원유량을 13만 8000 배럴 늘리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 때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올 1월부터 OPEC+를 상대로 “원유 가격을 낮추라”고 압박을 가했는데, 외신들은 이 압박이 통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공급 확대를 예상하는 또 다른 요인으로 우크라이나전(戰) 종전 협상을 계기로 한 미국과 러시아의 밀착이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2월 러시아산 원유에 대해 금수 조치(EU는 해상 물량에 국한), 러시아산 원유가 배럴 당 60달러 이상으로 팔리지 않도록 상한을 두는 등 제재를 단행했는데요. 그런데 친(親) 러시아 행보를 보이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 제재를 해제해 러시아산 원유 공급이 아무 제한 없이 시장에 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러시아도 OPEC+에 속해있죠.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의 경우에도 석유에는 수위 조절을 하는데요. 캐나다에서 들어오는 모든 수입품에 대해 25%의 관세율을 예고했지만, 원유나 석유제품의 경우 예외적으로 관세를 10% 만 매기겠다고 한 겁니다. 이마저도 미국·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USMCA) 규정을 준수하는 경우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 로이터통신이 전한 트럼프 행정부 내부 목소리입니다. 캐나다발(發) 석유 공급이 줄어드는 것은 막겠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2015년), 조 바이든(2021년) 두 전임 행정부가 불허 결정을 내렸던 송유관 키스톤 XL 프로젝트의 재개를 촉구했는데요. 키스톤 XL 프로젝트는 캐나다 앨버타주에서 미국 네브래스카주를 잇는 총 1931㎞ 길이의 송유관 건설 사업입니다. 당연히 석유 공급과 관련이 있겠죠?
정리하면, 트럼프는 석유 공급을 늘리고 유가를 낮추려는 정책을 펴고 있다는 겁니다. 트럼프는 집권 1기 때부터 저유가를 강조해왔죠. 관세로 인한 물가 상승을 압박하기 위해서라도 저유가는 그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유가는 약세 전망
중국은 세계에서 원유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죠. 2023년 원유 수입량이 3365억 달러(약 485조 원)를 기록해 전체 24.8%를 차지했는데요. 이런 중국의 석유 생산 감축 선언이 국제 에너지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됩니다. 공교롭게도 어떻게든 원유 공급을 확대하려 애쓰는 트럼프의 시도와는 정반대가 될 수 있겠네요.
미국의 공급 확대 전략에 국제유가는 당분간 약세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여기에 전방위적 관세 부과로 세계 각국의 수요가 감소하고, 특히 미국마저 경기 둔화로 인한 에너지 수요 감소가 예상되면서 공급 과잉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입니다. 물론 변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트럼프발(發) 변수들인데요. 미국은 이란을 핵 협상 테이블로 끌고 나오기 위해 이란산 원유 수출을 막으려 하고 있고요. 미·러 신(新) 밀월이라고는 하나,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종전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제재를 역시 카드로 쓸 가능성 또한 충분히 있습니다. 모두 세계 에너지 공급과 유가에 영향을 미칠 요소들이니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