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기업들의 숙원 사업과 같은 것이 있다. 바로 주 52시간 예외 적용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유수의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하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보다 유연한 노동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기업들은 근로기준법에 따라 주당 법정시간 40시간과 연장근로 12시간 등 총 52시간을 초과하지 않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적용하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과도한 노동을 줄이고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지난 2018년 도입됐지만 일부 업종에서는 유연성 부족에 대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반도체 업계다.
반도체 업계의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에 대한 갈증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업계가 그간 꾸준히 요구해왔던 사안이다. 이 같은 요구가 본격적으로 화두에 오르기 시작한 건 작년 11월부터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반도체특별법안을 발의했고, 여기에는 업계의 숙원으로 여겨졌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주 52시간제 예외)'이 포함됐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은 일정 연봉 수준 이상의 고연봉자에게는 근로시간 관련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여야 간 이견이 첨예하게 엇갈리면서 해당 법안이 수개월째 표류 중에 있다. 그러다 최근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민의힘 측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 '반도체 특별법 전면 재논의'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송언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지난 8일 "대미 수출 2위 품목인 반도체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되면 그 파장이 어느정도일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면서 재논의를 요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올해 '2기 행정부'를 시작하면서 관세를 무기 삼아 자국의 투자 등을 압박하고 있다. 반도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지난 6일 반도체에 100% 품목별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물론 정부가 지난 상호관세 협상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반도체 등 품목관세의 최혜국 대우 약속을 받아내 100% 관세까지는 아닐 것이라 예상된다.
이에 세부사항까지 나와 봐야 알겠지만, 반도체 산업은 국내 경제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즉 반도체 산업이 흔들리게 되면 단순 반도체 기업뿐만 아니라 국내 경제성장률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적잖은 파장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트럼프 관세 파고를 넘고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을 위해 주 52시간 예외 적용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기업 간의 대항전을 넘어 글로벌 대항전으로 번져가고 있다. 반도체 기술 패권 경쟁이 결국 국력으로도 이어진다는 점에서다. 이에 글로벌 주요 국가들도 반도체 기술력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해당 산업을 지원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유연한 근무 환경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일례로 글로벌 1위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를 들 수 있다. TSMC는 자타공인 파운드리 시장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는 기업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파운드리 업계에서 TSMC의 시장 점유율은 67.6%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같은 기간 2위를 차지한 삼성전자의 점유율이 7.7%를 차지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격차다.
TSMC의 성공 비결로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겠지만 이들의 연구개발(R&D) 경쟁력이 꼽힌다. 이들의 R&D 조직이 가동되는 시간은 24시간, 주 7일로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365일 풀가동되고 있다는 뜻이다. 주 52시간 근무로 운영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실제 주 52시간 제도 도입으로 오히려 연구개발 성과가 줄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올해 2월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산업기술진흥협의회는 기업부설연구소, 연구개발전담부서를 두고 있는 500여 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주 52시간 제도가 기업의 연구개발에 미치는 영향 조사'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기업 연구부서의 75.8%가 '주52시간제 시행 후 연구개발 성과가 줄어들었다'고 응답했다. 4곳 중 3곳이 연구개발 성과가 줄었다고 답한 것이다. 또한 조사 대상 기업의 53.5%는 주52시간제 시행으로 인해 '연구개발 소요시간이 늘었다'는 답변을 내놨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기업들에게 R&D 경쟁력은 생명과 같다"며 "글로벌 국가간 반도체 시장을 둔 경쟁은 하루가 다르게 치열해지고 있는데 주 52시간 근무만으로는 이들과 경쟁하기에 부족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R&D에 대한 투자와 우수 인재 확보 노력이 동반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반도체 경쟁력 차원에서 볼 때 빅테크 고객사들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 과감한 투자를 통한 기술력 제고와 우수한 인재 확보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