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대입 미신’에 빠져 있을 것인가

2025-03-17

수능은 악이고, 내신은 선이라는 믿음은 매우 독특한 것이며 보편화될 수 없다

그게 문제라면 미국 수능처럼 고교 교육으로부터 분리시키거나, 유럽 주요국처럼 논술형 시험으로 대체해야

바람직한 대입제도는 무엇인가? 내신성적 반영률을 높이고, 대입시험(수능) 비중을 낮추고, 학생에 대한 교사의 정성적 서술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우물 안 개구리의 것이다. 대표적인 반례가 세계 최고의 교육 선진국으로 알려진 핀란드이다. 핀란드는 내신성적을 반영하지 않는다. 대학은 전공별 지원자들 가운데 합격자를 순전히 대입시험 성적순으로 가려낸다. 경쟁이 상당히 치열해서 응시 첫해 대학에 진학하는 지원자는 절반이 안 된다.

핀란드의 대입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인시험이다. 고교 졸업자격시험 역할을 겸하지만, 통과 여부만 평가하지 않고 등급을 매겨 대입에 활용한다. 그래서 핀란드 사람들도 이를 입시(영어 번역으로 matriculation exam)라고 부른다. 문항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처럼 논술형이다. 예를 들어 영어 시험에서 어느 지역에 대한 정보를 준 뒤 ‘이곳을 알리는 홍보문을 작성하라’는 문항이 출제된다. 이와 별도로 대학별 본고사가 있다. 참고로 선진국 중 본고사가 광범위하게 치러지는 나라는 핀란드와 일본밖에 없다. 핀란드 본고사 형식은 논문을 읽고 토론하라는 주문에서 객관식 문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핀란드는 2020년 대입개혁 이후 모집정원의 40%는 본고사로, 60%는 공인시험으로 선발한다. 이 대입개혁 이전에도 내신성적은 반영하지 않았다.

내신성적에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 선진국 대입제도를 들여다보면, 대입시험과 내신성적을 동시에 반영하는 나라가 많다. 미국·독일·네덜란드·스페인·호주 등이 그렇다. 내신성적으로 장기적인 성취도 추세를 알아볼 수도 있고, 과제 연구나 수행평가 등을 반영할 수 있으므로 일회성 시험보다 폭넓은 역량을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내신성적을 반영하지 않는 나라도 여럿 있다. 핀란드·영국·일본·싱가포르 등이다. 내신성적에는 뚜렷한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교사별·지역별로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도 원래 내신성적을 반영하지 않았다. 올랑드 대통령 시절에 내신성적을 반영하려다 학생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반대 이유는 ‘담당 교사가 누구인지에 따라 대학 진학 여부가 달라지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마크롱에 의해 2021년부터 내신이 대입에 10% 반영되게 되었다. 종종 40% 반영된다고 잘못 소개되곤 하는데, 그 성적은 담당 교사가 아닌 외부 출제에 의해 주어지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내신성적이 아니다.

내신 단점 뚜렷…미반영 국가 여럿

참고로 대입시험이 아예 없고 내신성적 위주로 선발하는 나라도 있다. 캐나다와 노르웨이가 그렇다. 그러면 내신성적의 약점, 즉 학교별·교사별 편차를 어떻게 할까? 캐나다는 내신 편차를 줄이기 위해 주정부가 시행하는 성취도평가 성적을 일정 비율 반영하도록 한다. 대학에서 비밀리에 지원자의 내신성적을 보정하기도 한다. 노르웨이는 일부 과목에서 학교 간 비교평가를 실시하여 학교에 피드백을 준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내신성적이 상대평가이므로 어느 학교를 다니느냐에 따라 큰 편차가 존재하게 된다. 내신 상대평가는 동료 간의 경쟁을 유발하고 객관적 성취도와 무관하게 주어지므로 다른 선진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내신 상대평가가 비수도권, 비강남에 유리해지는 효과가 있고 오래전부터 써와서 익숙하다는 이유로 유지되고 있다.

대입시험과 내신성적을 활용하는 가장 흥미로운 경우는 덴마크다. 덴마크 대입제도는 얼핏 보면 내신성적만으로 선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덴마크는 고교별로 일부 학급을 선정하여 표준화 시험(이를 덴마크에서는 대입시험이라고 부른다)을 치른다. 고교별 학력 차이를 계산하고, 이를 통해 내신성적을 보정한다. 내신성적이 후하게 매겨진 경우는 낮추고, 박하게 매겨진 경우는 높이는 것이다. 내신은 내신이되 ‘표준화 시험을 통해 보정된 내신’이므로 일반적인 내신과 다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례는 스웨덴인데, 학과별로 정원의 일부는 내신성적만으로 선발하고, 일부는 대입시험만으로 선발한다. 대입시험과 내신성적의 장단점을 모두 수용하되, 합산하지 않고 두 가지 문을 따로 열어놓은 것이다. 어느 쪽으로 지원할지는 학생 자율이다. 한국의 수시, 정시와 비슷해 보이지만 시기가 서로 다르지 않고 동시에 치른다. 참고로 수시, 정시 식으로 두 번에 걸쳐 전형을 하는 선진국은 미국과 한국밖에 없다.

‘프랑스는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다’거나 ‘독일에는 입시가 없다’는 말도 유의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프랑스는 바칼로레아 시험 점수(내신 10% 포함)가 과목별 20점 만점에 10점이 넘으면 대학에서 무조건 입학시키고, 2000년대 이후 지원자가 넘치는 경우엔 추첨을 한다. 하지만 대학 외에 ‘그랑제콜’이라 불리는 분야별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들이 별도로 있다. 다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을 가지만 일부는 그랑제콜 준비학교(이른바 ‘프레파’)를 2년 거친 후 그랑제콜에 진학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프레파 이후 재수를 해도 그랑제콜에 가지 못하면 대학 3학년에 편입시켜 준다. 사정이 이러하니 프랑스에 의외로 학벌주의가 강하다. 공부를 잘하면 대부분 그랑제콜을 노릴 것 같다. 하지만 인기 직업인 의사가 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 그랑제콜은 그런 평범한(!) 직업인을 양성하지 않는다. 다만 의대에 가면 2학년 진급률이 20% 미만일 정도로 치열한 경쟁이 기다린다.

AI로 논술 채점…기술적 문제 해결

독일은 그랑제콜과 같은 기관이 없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보다 더 제대로 된 평준화다. 독일의 비직업계 고등학교에서는 공인시험 3분의 1, 내신성적 3분의 2의 비중으로 합산한 점수가 일정 수준이 되면 고졸 학위증(아비투어)을 준다. 독일의 모든 대학 학과들의 60%가량은 이 학위증만 있으면 입학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때의 공인시험을 ‘입시가 아니다’라고 주장할 근거가 생긴다. 일종의 자격시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40%에 해당하는 인기 학과들은 정원 제한(numerus clausus) 학과로 불리며 핀란드처럼 상당한 입학 경쟁이 존재한다. 여기서 학생을 선발할 때 절대적으로 중요한 전형요소가 성적이다. 이런 의미로 보면 독일에는 입시가 있다. 고교 교사가 출제하지 않은 외부 시험(external exam)으로서 대입에 활용되는 것은 입시라고 부르는 것이 상식이다.

독일에는 대기입학제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다. 정원 제한 학과 정원의 20%는 대기 입학자 중에 받아들이는데, 대기자로 등록해 놓고 기다리면 몇년 뒤에든 입학 기회를 주는 것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다시 공부하거나 전공을 바꿀 목적으로 활용한다. 이런 식으로 예를 들어 간호사를 하다가 의대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독일에서 재수가 법적으로 금지돼 있기 때문에 생긴 고육지책이다. 일생 동안 아비투어 성적을 변경할 기회가 없으니 위헌적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기입학제를 만든 것이다. 그나마 의대는 2020년에 대기입학제를 폐지했다. 그 대신 정원의 10%를 적성고사(수학·과학·추론 등)로 선발하며 그중 일부는 농촌 지역에 10년간 근무하도록 했다.

정성평가 요소를 반영하는 것도 보편적이지 않다. 정성평가 요소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주요하게 활용되는 것은 자기소개서인데, 선진국 가운데 지원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자기소개서를 요구하는 나라는 미국, 영국, 아일랜드 정도이고 그 밖에 캐나다, 싱가포르의 경우 일부 대학에서 요구한다. 나머지 나라들은 자기소개서를 외국인에 한하여 요구한다. 한국은 자기소개서를 최근 폐지했지만, 여전히 전 세계에서 가장 번잡한 학교생활기록부를 활용해 교사들을 괴롭히고 있다.

수능은 악이고, 내신은 선이며, 성적순은 나쁜 것이고, 정성평가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한국 주류 교육계의 통념이다. 보수와 진보, 이주호와 김상곤이 교집합을 이루는 지점이다. 하지만 다른 선진국들과 견줘 보면 이러한 믿음은 매우 독특한 것이며 보편화될 수 없다. 물론 한국 수능에는 문제가 있다. 한국은 선진국 중에서 객관식 대입시험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나라다. 그런데 그게 문제라면 미국의 수능(SAT·ACT)처럼 고교 교육으로부터 분리하거나, 유럽 주요 국가들처럼 논술형 시험으로 대체할 생각을 해야 한다. 인공지능으로 논술형 채점이 가능해진 상황이므로 기술적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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