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사 CEO 주지승은 왜 몰락했을까

2025-08-15

스님들이 새벽에 일어나 예불을 올린다. 방문객들이 법당에서 향을 피우는 데 돈을 낼 필요가 없다. 모바일로 향값을 받기 위해 목에 QR코드를 걸고 다니던 스님은 사라졌다.

사찰의 당연한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홍콩 펑황왕 등이 전한 중국 허난성 정저우 덩펑시 소림사에서 주지승 스융신(釋永信·60)이 체포된 이후 생겨난 변화다.

해외 5성급 호텔과 유원지도 운영

스융신의 별명은 소림주식회사 최고경영자(CEO)다. 그는 1999년 주지승 취임 이후 무술캠프뿐만 아니라 출판, 공연, TV 프로그램 제작, 제약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부동산도 줄줄이 사들였다. 불교를 알리는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명분으로 2015년 호주에 짓기 시작한 5성급 호텔과 유원지도 소림사 해외 재산 중 하나다.

스융신의 지휘하에 소림사는 연매출액 10억위안(약 1900억원)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소림사는 세계 50개국에 지사격인 ‘소림문화센터’를 건립하고, 무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차, 게임, 제약 등 보유 상표권이 666개로 알려졌다. 소림사는 2008년 계곡에서 승려들과 비키니 차림의 여성들이 무술을 단련하는 이미지로 홍보해 구설에 올랐다.

스융신의 26년 소림사 지배가 끝났다. 소림사는 지난 7월 27일 “스융신이 사업 자금과 사찰 재산을 횡령하고, 불교 계율을 심각하게 위반하고, 오랜 기간 여러 명의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사생아를 낳은 혐의로 현재 여러 부서의 합동 조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불교협회도 이튿날 스융신의 승적을 박탈했다고 밝혔다. 소림사 주지는 허난성 뤄양 백마사 주지 인러(銀樂)로 교체됐다.

중국에서는 스융신의 몰락을 두고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몰락이 ‘왜 하필 지금’ 온 것인지에는 물음표가 붙는다. 소림사의 한 신도가 2015년 스융신의 사생활 문제와 사찰 재산 횡령 의혹을 제기했으나 당국은 증거 불충분이라며 2017년 고발을 취하했다. 스융신에 대한 비리 의혹 제기는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독립 사회학자 쑹추양(가명)은 자유아시아방송(RFA)에 “이번에 드러난 스융신의 혐의는 10년 전 제기된 것과 거의 유사하다”며 “차이는 지방정부 재정 상황”이라고 전했다. 코로나19와 부동산 경기 침체를 겪으며 중국 지방정부 재정 상황은 10년 전보다 크게 악화했다.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도 스융신과 소림사, 지방정부 관계를 주목하는 기사를 냈다.

차이신에 따르면 스융신은 16세 때인 1981년 소림사에 입문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무술을 배우기 위해 소림사를 찾았다고 한다. 서기 495년 건립된 중국 선불교의 본찰 소림사는 중국 내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문화대혁명 기간 파괴되고 재산은 정부에 빼앗긴 상태였다. 승려들은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했고, 지방정부에 사찰 재산 반환을 호소했다.

1982년 중국·홍콩 합작영화 <소림사>가 크게 흥행했다. 세계적으로 소림사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며 여행 붐도 불었다. 중국 정부는 전통문화 진흥과 관광자원, 개혁·개방으로 변화하는 중국 홍보 등의 차원에서 종교를 바라보게 됐다. 1984년 소림사는 입장료 수입을 되찾았고, 승려들에게 월급을 줄 정도로 경영이 안정됐다.

스융신은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쏟아지는 관심 속에서 ‘선불교’와 ‘무술’의 결합이 해외에서 흥행 상품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1989년 소림무승단(武僧團)을 조직해 해외 공연을 다녔고, 곳곳에서 호평을 받았다. 1993년 대만을 방문해 양안 첫 종교 교류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1995년 스융신은 허난성 당서기를 직접 설득해 소림사 건립 150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17개국 이상에서 수천명의 방문객과 수백명의 취재진이 방문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스융신은 1999년 34세의 나이로 소림사의 주지가 됐다. 1998년부터 2018년까지 중국의 입법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 대의원(한국의 국회의원 격)을 맡았고, 허난성 불교협회장도 지냈다. 차이신은 스융신이 과거 인터뷰에서 “합법적 영리사업은 소림사에 적합한 역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종교와 상업화 간의 마찰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융신에게 위기는 세 차례 다가왔다. 위기 때마다 관과 결탁하거나 대립했다. 첫 번째는 소림사 주변에 온갖 상업시설과 노점 등이 생겨난 2000년 벌어졌다. 스융신은 ‘잡스러운 시설들’이 사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 당국에 철거하도록 압박했다. 격렬한 반발이 일었다. 스융신의 재가 불제자들도 스융신을 향한 비난과 투서에 동참했다. 스융신이 대대적 원한을 쌓은 첫 사건이다.

개혁·개방으로 얻은 명성과 기회

두 번째 위기는 2009년 기업공개(IPO)를 요구받을 때였다. 지방정부는 관광자산을 현금화하기 위해 국유기업인 홍콩차이나트래블서비스와 송산 일대를 관리하는 합작법인을 세우고 소림사에도 2010년까지 IPO를 하도록 명령했다. 스융신은 당국에 저항해 소림사의 IPO를 보류시켰다. 소림사의 자산이 지방정부에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알려졌다.

스융신은 소림사 상업화를 이끌었지만, 사찰 입장객을 상대로 직접 영업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소림사와 지방정부가 1980년대부터 입장료를 두고 벌인 갈등이 단적인 예다. 지방정부는 1994년 소림사와 인근 송산 일대 관광지를 묶어 통합 입장료 40위안을 책정하고 소림사가 8위안을 가져가는 것으로 타협했다. 2005년 지방정부가 시설 보수공사 후 입장료를 100위안으로 인상하려 하자 스융신은 전인대 대표 권한을 이용해 막으려 했다.

세 번째 위기였던 2015년 스융신의 사생활 문제 고발 역시 “단순히 제자들끼리 벌인 일이 아니라 지방 공무원들과 사업가들이 계획하고 참여한 것”이라고, 당시 사안을 잘 아는 관계자를 인용해 차이신은 보도했다. 당국은 스융신의 사생활 의혹과 관련해선 무혐의라 하면서도 소림사 재정 관리에 개선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문화대혁명의 그늘 속에서 불교계에 입문했던 스융신은 소림사의 독립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경영을 추구하면서 소림사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던 지방정부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대립했다는 것이 차이신의 설명이다.

개혁·개방과 이후 중국 자본주의의 궤적을 함께 걸으며 성장했던 소림사는 다시 갈림길에 들어섰다. 중국판 종교개혁이 있을지, 소림사의 막대한 재산은 어디로 갈 것인지 궁금증이 분분하다. 스융신의 구체적 혐의에 대해 소림사 측은 적당한 때 밝히겠다고 전했다. 현재 소림사는 중국 공산당의 종교관할기구인 통일전선부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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