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디지털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가 국내외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단순히 신나는 오락물에 그치지 않고, 팬덤의 ‘선한 영향력’을 전면에 내세운 독특한 세계관이 특히 눈에 띈다.
작품 속 주인공은 팬들의 응원과 지지에 힘입어 악령을 물리친다. 이야기는 판타지지만, 실은 현실 속 팬덤이 문화와 사회에 미치는 힘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설정이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팬덤은 ‘오빠부대’나 ‘사생팬’처럼 부정적으로 소비된 이미지가 많았다. 하지만 케데헌은 그 반대의 가능성, 즉 팬덤이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드라마틱하게 증명한다.
사회 공헌 등은 팬덤의 새 정체성
문화 소비자로 사회 변화의 주역
서울을 케데헌 ‘팬덤 성지’로 추진
도시와 결합시켜 경제 효과 노려

한국 팬덤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로 대표되는 ‘오빠부대’는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대중문화를 직접 움직이는 집단으로 떠올랐다. 이어 H.O.T 등 1세대 아이돌 시절엔 사생활 침해로 논란이 된 사생팬도 있었지만, 공연 흥행과 음반 소비로 K팝 성장에 큰 몫을 했다.
2000년대 이후 K팝이 해외로 뻗어나가면서 팬덤은 국경을 넘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진화했다. 그 정점은 2010년대 BTS(방탄소년단)와 ‘아미’였다. 이들은 단순한 팬클럽이 아니라, BTS의 글로벌 무대를 위해 번역과 온라인 홍보, 기부, 사회운동까지 자발적으로 해냈다. 아미가 유니세프와 함께한 ‘Love Myself’ 캠페인이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은 팬덤이 사회에 참여하는 모범 사례로 꼽힌다.
뮤지컬 분야에서도 ‘N차 관객’이라는 새로운 팬덤 현상이 등장했다. 좋아하는 배우나 작품을 위해 같은 공연을 몇 번이고 보는 팬들 덕분에 장기 공연이 가능해지고, 공연장 주변 상권과 문화상품 시장도 활기를 띤다. 이런 반복 관람 문화는 대중음악을 넘어 예술 전반에 걸쳐 지속 가능한 산업 구조를 만드는 중요한 축이 됐다.
팬덤은 힘이 세다. 그 힘이 긍정적일 때 문화산업의 성장 엔진이 된다. 팬들은 음반·티켓·굿즈를 구매하고, 온라인에서 자발적으로 홍보하며, 콘텐트 제작에도 참여한다. 최근에는 기부와 봉사, 환경 캠페인 등 사회공헌 활동이 팬덤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BTS의 아미가 꾸준히 펼친 기부와 자원봉사, 기후변화 대응 프로젝트 활동 등이 좋은 예이다.
하지만 어두운 면도 간과할 수 없다. 일부 팬의 사생활 침해와 과열 경쟁, 마구잡이식 비방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익명의 온라인 공간에서 악성 댓글과 팬덤 간 갈등은 아티스트와 팬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 건강한 팬덤 문화를 위해선 스스로를 지키는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케데헌 팬덤 효과는 문화예술 영역을 넘어 도시 마케팅, 관광, 경제 분야로까지 번지고 있다. 서울이 배경인 케데헌의 돌풍에 놀란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를 활용해 서울의 K컬처 이미지를 전 세계에 알리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오 시장은 케데헌과 관련된 관광 상품과 축제, 투어 프로그램 등을 구상하며, 이를 통해 서울을 ‘팬덤 성지’이자 즐거움이 넘치는 ‘펀 시티’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단순한 문화 소비를 넘어, 콘텐트와 도시브랜드를 결합해 경제와 관광을 동시에 활성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이것은 팬덤 세계관이 도시브랜드와 결합해 새로운 산업 효과를 낳는 대표적인 사례다. BTS 콘서트가 수천억원의 경제 효과를 창출했듯, 웹툰과 애니메이션, 뮤지컬 장기 공연은 문화와 관광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케데헌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팬덤은 더 이상 순수한 팬심에 기대던 오빠부대 수준이 아니다. 이제 그들은 주도적인 문화 소비자이자 생산자이며, 사회 변화를 이끄는 파트너다. 시야를 더 넓히면, 팬덤의 선한 영향력은 문화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소중한 자산이다.
케데헌은 그 가능성을 상상 속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이야기로 끌어와 성공적으로 풀어냈다. 이제 팬덤은 우리 문화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이며, K컬처의 다음 장을 열 핵심 동력이다.
이번주 케데헌의 대표곡 ‘골든’ 이 미국의 빌보드 싱글 차트 핫100 정상에 올랐다. 여성 가수가 부른 K팝 노래로는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 노래 속 가사처럼 팬덤의 시대는 이미 우리 곁에 와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시간이야, 두려움도 거짓도 없어, 그게 우리가 태어난 이유야.”
정재왈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