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한국에 들어와 서울시 가사관리사 사업에 참여한 한 필리핀 여성은 “돌봄 계약에 사인하고 정작 아이는 만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오히려 가사 노동을 넘어 반려동물 관리와 고용주의 친척 집 청소에 이르기까지 업무 범위만 날로 늘었다. 저임금과 과도한 이동 시간을 이유로 문제를 제기했지만 관리 업체로부터 “바꿔줄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필리핀 가사관리사 제도의 좌초는 부실한 정책 설계가 수요자들의 외면과 이주노동자에 대한 통제 강화라는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제도는 한국인 부모의 양육 부담을 줄여줄 저출생 문제 해결책으로 제시됐지만 돌봄 노동 시장이 형성되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다. 문제 제기 창구마저 가로막힌 상황에서 모호한 업무 범위, 사측과의 소통 부재, 불안정한 체류권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코리안 드림’을 찾아 온 이주노동자들 몫으로 돌아갔다.
4일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 사업은 지난해 9월 저출생 및 경력단절 문제의 대안으로 도입됐다. 필리핀 정부가 인증한 돌봄 자격을 가진 100명의 여성 가사관리사를 선발해 6개월간 서울시 가정에 파견하는 방식으로 시작됐다. 당시 돌봄 공백 해결 시도일 뿐 아니라 불법체류자에 의한 외국인 노동에서 벗어난 제도적 혁신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하지만 수요 예측 작업에서부터 어긋났다. 공적 제도 아래 입국한 이주노동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서는 적절한 경제적 유인을 부여하는 작업이 필수다. 하지만 중산층 가정에서 한국어가 서툴면서 고용에는 상당한 비용이 필요한 필리핀 노동자들의 수요가 높지 않았다. 실제로 이번 시범 사업에 참여한 가정들을 살펴봤을 때 비교적 소득이 높은 강남 3구 가정 의존도가 40%를 넘겼다. 반면 나머지 22개 자치구의 수요는 저조했다.
한국에 머무르는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싶었던 필리핀 가사노동자들의 욕구와도 대비됐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은 약 800시간에 이르는 시간을 들여 현지 돌봄 노동 자격증을 갖췄다. 게다가 한국 입국을 위해 최대 수백만 원에 이르는 각종 수수료들까지 지불했다. 이들은 큰 꿈을 안고 한국에 온 만큼 대중교통을 통한 서울 내 이동 시간조차 낭비로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낮은 임금에 더해 서울 시내 지자체 곳곳을 오가는 비효율적인 동선과 그로 인한 피로라는 현실에 내몰렸다. 수요 가정에서는 돌봄과 별개로 각종 허드렛일 수행까지 원했는데 이 역시 공급자인 가사노동자들의 실망만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노동부가 마련한 상담 창구는 사실상 무용지물로 전락했다. 서울시가 지정한 두 곳의 가사관리사 위탁 업체는 이주노동자 관리 경험이 없다시피했다. 업체들의 입장에서는 이탈을 막을 근본적 해결책 없이 통제 책임만 떠안은 꼴이다. 소통 부재 속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이탈을 방지하려다 보니 업체들에 의한 기숙사 통금과 ‘쪼개기 계약 연장’이라는 기형적 통제 방식이 생겨났고 외로움과 고단함을 달래줄 가사노동자 간 교류마저 감시 대상이 됐다. 이미애 제주대 학술연구교수는 “위탁 업체들이 이주 가사노동자 중 일부를 내근직으로 두고 이들을 통해 모든 요구 사항을 전달하게 하고 있다”며 “중간 관리자들이 사실상 고용주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현장의 의견을 왜곡해 전한다면 대등한 협의가 이뤄지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강화된 통제 탓에 제도를 둘러싼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앞서 6월 서울시의회가 연 토론회에서는 필리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금 부과와 협박·성추행 행태가 벌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즉각 사실이 아니라는 취지의 해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주민 인권 단체들은 당초 인터뷰에 참여해 문제를 제기한 노동자들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전한다. 송은정 이주민센터 친구 센터장은 “노동자들은 최소 3년 이상 일할 생각으로 한국에 왔기에 사업이 중단될 정도로 문제가 커지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우려가 크다”면서 “이들 입장에서는 실제 피해를 외부에 말하기 더욱 어려운 구조가 됐다”고 설명했다.
문제를 미리 예견하고도 대책에 소홀했던 점이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2023년 7월 ‘외국인 가사근로자 도입 시범사업’ 공청회를 열었을 때 여성·노동계는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착취가 발생하는 데도 개인이 거부할 수 없는 구조는 ‘현대판 노예제’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는 취지였다. 인권 단체들은 관리 업체를 통해야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외부에 표출될 수 있는 특성상 알려지지 않은 피해 사례가 더욱 많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고용부와 서울시는 당초 본사업에서 1000명 이상으로 규모를 늘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각종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이 계획은 사실상 유보됐다. 지난해 12월 고용노동부 조사 당시 소수 인원을 제출한 부산과 세종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지자체에서의 수요도 거의 없는 상태다. 이미 한국에 들어와 활동 중인 가사관리사들의 취업 기간만 최대 36개월로 연장되는 데 그쳤다. 조영관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충분한 정보와 체계적 제도를 제공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강제 노동이나 인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며 “엉성한 제도로 이탈 위험만 키운 채 운영을 업체에 떠넘기면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