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방약무인(傍若無人)과 형가(荊軻)

2024-10-21

진시황은 키가 꽤 큰 편이었다. 약 190cm의 장신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안하무인(眼下無人)에 누구도 못 믿는 성격인지라 친정(親政)을 시작한 후에 늘 검(劍)을 휴대하고 생활했다. 훗날 중국을 통일하고 진시황으로 등극하게 되는 영정(嬴政)은 32세이던 어느 날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을 한 차례 경험한다. 독이 묻은 작은 칼 한 자루에 그만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이었다. 그는 연(燕)나라 태자 단(丹)이 고용한 자객 형가(荊軻)에 의해 자신의 궁정에서 소맷자락을 날카로운 비수(匕首)로 베이고 만다. 물론 그날도 영정은 긴 칼 한 자루를 허리띠에 차고 있었다.

이번 사자성어는 방약무인(傍若無人. 곁 방, 같을 약, 없을 무, 사람 인)이다. 첫 글자 ‘방’은 ‘~의 곁에’라는 뜻이다. 뒤의 세 글자 ‘약무인’은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이란 뜻이다. 이 둘이 합쳐져 ‘마치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요즘에는 과하게 오만방자(傲慢放恣)하거나 오만불손(傲慢不遜)한 태도를 표현할 때 주로 쓰인다.

형가의 본래 성은 경(慶)이다. 소국 위(衛)나라에서 태어났다. 전쟁과 관련된 가족사의 슬픈 사연으로 성을 바꾸고 주로 연(燕)나라에서 생활했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검술 훈련을 좋아했다.

장성한 후, 형가는 주로 연나라 수도의 시장에서 한 개백정 친구와 함께 축(筑)이라는 현악기를 잘 연주하는 고점리(高漸離)와 어울리며 소일했다. 이 셋이 술을 마시면 고점리의 축 가락에 맞춰 두 사람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흥이 무르익으면 광인처럼 불시에 크게 흐느끼기도 했다. 북적이는 저잣거리지만 마치 주위에 사람이 없는 듯 자신들의 유흥 문화를 즐긴 것이다. ‘방약무인’이라는 사자성어가 바로 이들의 이 태도에서 유래했다.

태자 단의 요청을 받고 형가를 자객으로 추천한 이는 전광(田光)이었다. 전광은 은거하며 협객과도 왕래하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인재를 알아보는 예리한 눈이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만약 대의명분만 확실하다면 형가는 영정 암살이라는 임무를 능숙하게 실행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쌀쌀한 어느 날, 형가는 자객 임무 수행을 위해 진(秦)나라로 출발한다. 이날 형가의 행장에는 진나라에 바치겠다고 속이기 위한 지역의 지도 한장과, 진나라 장수였다가 연나라로 망명했기에 목에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번오기의 잘린 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13세에 첫 살인을 경험했다는 진무양(秦舞陽)이라는 풋내기 장사(壯士)도 태자 단의 추천으로 동행했다. 이 둘을 위해 태자 단은 역수(易水) 부근에서 송별 자리를 마련한다.

‘바람은 소소하고 역수 물 차갑구나. 장사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 이날 형가는 고점리의 축 가락에 맞춰 자신의 비장한 각오를 이렇게 노래했다.

형가의 이런 각오에도 불구하고 거사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 거사 당일, 영정에게 다가가기 직전에 조수 진무양이 겁에 질린 표정과 태도를 드러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약자의 목숨을 빼앗았던 진무양의 살인 경험과 정예 호위병들에 둘러싸인 절대권력자를 독이 묻은 짧은 칼 한 자루로 살해하는 일은 분명 다른 차원의 일이다. 평정심 유지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형가는 급히 계획을 바꿔 홀로 자객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영정의 옷소매만 베는 데 그치고 실패했다. 형가는 현장에서 영정과 호위병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당연히 진무양도 따로 심문을 거친 후 처형됐다. 분노한 영정은 연나라를 침공하고 멸망시킨다.

역사가 사마천은 ‘자객열전(刺客列傳)’에서, 비록 영정 암살이 성공하진 못했지만 형가가 품었던 뜻이 뚜렷하고 높았기에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의 성패 여부보다 ‘품은 뜻’을 인물 평가 기준으로 삼은 것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도연명(陶淵明)도 ‘영형가(詠荊軻)’라는 시를 지어 형가의 혼을 위로했다. 사마천과 도연명이 형가의 행적에서 주목한 것은 ‘방약무인’이 아니었다. 그들 마음의 눈이 응시(凝視)한 것은 문무(文武)가 하나 된 ‘호연지기(浩然之氣)’였다. 영웅들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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