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아닌 티볼트와 머큐쇼의 사랑에 기립박수

2025-02-21

차별·금기를 넘다…줄잇는 퀴어 콘텐트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이면에 줄리엣의 사촌 티볼트와 로미오의 친구 머큐쇼의 그보다 더한 사랑의 비극이 있었다. 화제의 연극 ‘스타크로스드’의 설정이다. 영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젊은 극작가 레이첼 가넷과 필립 윌슨 연출의 최신작을 발빠르게 들여온 무대인데,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초현대적으로 비튼 재치 만점 스핀오프다. 스토리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전개 자체는 발랄하다. 김경수·박정복·정동화·김찬호 등 ‘대학로 황태자들’이 연기하는 동성 커플의 알콩달콩에 객석에선 시종일관 빵빵 터지고, 적극적인 애정씬에도 거북스런 반응은 없다. 뻔한 고전을 절묘하게 각색해 단 3명의 배우가 이토록 현재적인 ‘롬앤줄’ 무대를 만들어내는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뿐. 커튼콜엔 무조건반사처럼 전석 기립박수가 터져 나온다.

연극이 마니아 장르라 그런 건 아니다. ‘퀴어’는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핫한 문화 코드다. 다음달 개봉하는 영화 ‘콘클라베’에선 성소수자를 교황으로 선출해버렸다. 국내서도 잘 나가는 대중문화 콘텐트에는 퀴어 코드가 꼭 등장한다. 10일 공개된 U+모바일tv 드라마 ‘선의의 경쟁’은 ‘응답하라 1988’에서 귀여운 이미지로 각인된 이혜리의 동성키스씬으로 화제몰이를 했다. 지난해 ‘밤양갱’으로 대박을 친 가수 비비도 ‘DERRE(데레)’의 뮤직비디오에서 배우 전종서와 GL(Girls Love)을 연기했는데 대중가수의 낯선 퀴어 코드에 댓글 반응이 예상외다. “진짜 10대 때 짝사랑했던 날 보는 것 같다”는 격한 공감이 대세고, 불편하다는 반응은 찾기 힘들다.

티볼트·머큐쇼 사랑에 커튼콜 기립박수

불과 몇 년 전까지 방송가의 금기였던 ‘퀴어’를 양지로 끌어낸 건 OTT서비스다. 미디어 업계의 경쟁이 거세지면서 다양한 콘텐트에 대한 수요가 폭발한 것. 2022년 토종 OTT 왓챠의 BL(Boys Love) 드라마 ‘시맨틱 에러’의 성공 이후 퀴어가 새로운 장르로 급부상하며 ‘남의 연애’ ‘메리퀴어’ 등 실제 소수자들이 출연하는 예능까지 등장했다.

과거에도 없진 않았다. 90년대 ‘야오이’라 불리는 일본의 BL 장르 만화가 인기를 끌자 한국에도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 원수연의 ‘렛 다이’ 등 미소년들의 사랑을 그린 만화가 등장해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2000년대 들어 ‘번지점프를 하다’(2000), ‘왕의 남자’(2006), ‘쌍화점’(2008) 등 동성애를 감각적으로 다뤄 호평받는 영화들이 나왔지만, 결국 정체성 혼란이나 사회적 편견을 이기지 못하는 비극적인 결말로 점철됐다. ‘커피프린스 1호점’(2007), ‘미남이시네요’(2009), ‘성균관 스캔들’(2010) 등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유사 동성애 코드의 TV드라마들은 한결같이 젠더 이분법을 강화하는 성격이었다.

초기 퀴어가 멜로물의 소재 확장에 그쳤다면, 최근의 퀴어물은 훨씬 다양해졌다. 로맨스를 넘어 성소수자들의 일상이나 삶 자체에 주목하는 추세다. 지난해 동시에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어 퀴어를 대중문화 정중앙으로 끌어올린 ‘대도시의 사랑법’의 원작자 박상영 작가는 “순도 100% 있는 그대로의 2010년대 퀴어의 삶을 박제하듯 보여준다”는 기획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원작 소설은 2022년 최고 권위의 부커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는데, 자유로운 사랑을 하는 게이 남성을 통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뿐 아니라 사랑과 우정, 동성애와 이성애에 관한 모든 고정관념을 뒤흔들었다 할 만하다.

요즘 퀴어들은 정체성 혼란 없이 아주 쿨하게 그려진다. JTBC 드라마 ‘옥씨부인전’에서 추영우가 연기한 성윤겸은 양반집 자제의 부귀영화를 버린 채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지키고 역병 격리촌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죽음으로써 정의 구현에 이바지하는 멋진 역할이다. ‘오징어게임’ 시즌2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박성훈이 연기한 트랜스젠더 현주였는데, 중반까지 얌전한 단발머리로 휴머니즘을 담당하다 막판 총격전에서 특전사 출신으로 맹활약하는 반전 매력을 어필했다.

지난해 하반기 10편 가까이 개봉된 퀴어 소재 영화들은 더욱 다양한 범주의 성소수자들을 등장시켰다. 부쩍 눈에 띠는 건 ‘여여 로맨스’의 득세다. 지난해 역대급 베드신으로 화제가 된 영화 ‘히든페이스’는 조여정과 박지현의 에로티시즘을 송승헌이 거들 뿐이었다. 이유미가 주연한 독립영화 ‘우리들은 천국에 갈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한소희가 주연한 ‘폭설’도 학교를 배경으로 두 소녀의 우정을 넘어선 감정의 실체에 현미경을 댔다.

레즈비언 커플이라고 사랑만 하는 건 아니다. 영화 ‘럭키, 아파트’의 선우와 희서는 한국의 모든 젊은 커플이 겪을 법한 다양한 경제적 상황에 더해 혐오의 시선까지 감당해야 한다. ‘영끌’로 장만한 아파트 배수구에서 은근히 올라오는 악취는 실체도 없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혐오의 알레고리다. 고독사한 이웃 노파 때문에 가시화되는 혐오로 커플은 갈등하지만, 결국 ‘성소수자로서 맞게 될 노년’이라는 두려움을 연대로 해소하길 선택한다.

그 두려움은 영화 ‘딸에 대하여’에서도 공유하고 있는데, 비슷한 문제를 어머니의 시선으로 조망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는 딸 그린이 장차 자신이 돌보는 노파처럼 외로워질까봐 레인과의 사랑을 노골적으로 혐오한다. 하지만 그린과 레인은 측근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차별 속에서도 남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엄마는 외로운 노파의 최후까지 살뜰히 챙기는 그들에게서 혐오를 거두고 ‘동행’이라는 희망을 발견한다.

12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은 실제 70대 레즈비언 커플의 동행을 비춘다. 파독 간호사 출신인 수현과 인선은 1980년대 한인 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했던 수현과 달리 인선은 평범하게 꾸렸던 가정을 버려야 했다. 교회를 함께 다니면서도 별다른 혐오의 시선 없이 인권 운동에 동참하며 40여년을 함께해온 이들은 몇 해 전 공식적인 부부가 되어 평범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할머니 두 사람이 서로 약을 챙기고 로션을 발라주며 가끔 블루스도 추는 모습이 외롭지 않아 보인다.

“퀴어 이상하게 여기는 시선이 더 이상”

두 사람은 “독일이기에 가능했지 한국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2017년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독일과 한국은 ‘혐오’의 수준이 다르다는 얘기다. 두 사람을 2019년부터 2년간 촬영한 반박지은 감독은 “퀴어 퍼레이드 촬영 당시 독일에선 어려움이 없었지만 한국에선 혐오 진영에게 위협을 느꼈다”고 했고, 김다형 프로듀서도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가 혐오의 오랜 역사를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 사회도 급변하고 있다. 지난해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 방영 전 전국 119개 시민·학부모 단체가 방영 계획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지만, 드라마 공개 직후 X(구 트위터) 국내 실시간 트렌드에 오르며 호평받았다. 영화 버전은 실관람자만 매길 수 있는 CGV 에그지수 94%를 기록하고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등 2관왕에 올랐다. 또 지난주 넷플릭스 공개 이후 국내 영화 1위를 고수하며 대세를 입증하고 있다.

심리학자 조지선 박사는 “과거에는 생소한 걸 배척하고 경계하는 걸 당연시했다면, 지금은 이질적이라도 열린 마음으로 포용성을 갖고 대해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사회적 규범이 됐다”면서 “대중의 취향을 좇는 문화 콘텐트 제작자들이 퀴어를 힙하고 트렌디한 요소로 적극 소화하는 것은 퀴어의 지위가 달라졌음을 말해준다. 새롭고 신기한 것에 대한 창작자의 욕구를 건드리면서도 욕먹지 않을 만한 안전망이 확보됐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퀴어의 법적 지위도 달라질까. 마침 지난해 동성 커플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국내 최초로 동성 커플의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라 주목할 만하다.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는 정지우 변호사는 “이미 문단 쪽에선 퀴어가 주류라고 할 정도니 안방으로의 확산도 자연스럽다. 전 세계적으로 MZ세대에겐 당연한 인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문화현상적으로는 퀴어를 이상하게 여기는 시선이 더 이상해 보인다”면서 “사회에서 가장 늦게 바뀌는 게 법이고 법률개정의 과정도 만만치 않지만, 사회적 인식과 윤리가 바뀌고 있으니 장차 법적으로도 여러 종류의 변화를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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