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스포츠 라운지

‘딸깍.’
까무룩 잠이 들었을까. 1960년대의 저녁은 일찍 시작되었다. 어둠은 이내 깊고 밤은 고요했다. 먹물에 잠긴 듯, 눈을 크게 떠도 사위엔 어둠 뿐. 소년은 아버지가 라디오를 켜는 소리에 잠이 확 달아났다. ‘웅-’하는 잡음. 곧 이어 약간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상하(常夏)의 나라, 비율빈의 수도 마닐라입니다. 지금부터, 한국과 비율빈, 비율빈과 한국의 아세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경기 실황을….”
‘남국(南國)’. 야자수가 바람에 잎을 날리고 피부가 새카만 사람들이 산다고 했다. 소년이 아는 ‘상하의 나라’는 그런 곳이었다. 소년은 ‘비율빈(比律賓)’이 필리핀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렇지만 라디오에서 비율빈이라는 나라 이름이 나오면 뜨거운 바람이 훅 끼치는 것처럼 실감이 났다. 농구는 그렇게 먼 곳에서 소년에게 왔다.
대한민국 농구 팀이 외국에 나가 경기를 하는 밤이다. 소년의 머릿속에는 특설코트가 세워졌다. 바람에 잎을 날리는 야자수 아래 학교에서 본 녹슨 농구대가 우뚝 섰다. 거기서, 가슴에 태극기를 단 우리 선수들이 경기를 했다. 경기는 박진감이 넘쳤다. 1960년대의 중계방송은 청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중계 캐스터의 음성은 감정에 호소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동파군, 조국의 품에 다시 두 점을 바칠 차안스, 프리드로(프리스로·자유투) 제일구… 네, 골인입니다! 제이구….”
김기수 ‘세계 챔프’ 오른 장충체육관
‘프리드로 제일구’와 ‘네, 골인입니다!’ 사이에 심연이 가로놓였다. 먹물에 잠긴 듯한 어둠, 비율빈에서 한국까지의 가없는 거리, 말 없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공감. 그리고 이제 삶과 죽음의 거리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영겁 같은 그 거리도 언젠간 지워지리라. 소년은 농구를 사랑하게 되었다. 비율빈 특설코트는 훗날 구체적인 모습으로 소년을 맞았다.
장충체육관.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경기장이다. 1963년 2월 1일 문을 연 이 경기장을 필리핀 사람들이 지었다는 소문이 있다. 한국이 가난하고 기술도 부족한 후진국 시절에 필리핀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같은 주장을 했다. 한국의 발전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필리핀과 비교해 설명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맞지 않는 이야기다.
장충체육관은 우리가 지었다. 디자인은 서울 종로 YMCA를 설계한 김정수, 구조설계는 미국에서 구조학을 공부한 최종완이 맡았다. 공정상 최대 난제는 한국 최초로 시도한 직경 80m짜리 철골 돔이었다. 이론상 가능했지만 결과는 예측불허. 돔을 완성한 지 사흘 뒤 많은 눈이 내렸다. 돔은 하중을 거뜬히 이겨냈다. 그제야 최종완도 안심했다.
장충체육관의 뿌리는 1955년 6월 23일에 개장한 육군체육관이다. 제1201 건설공병단이 공병감 엄홍섭의 설계에 따라 지었다. 바닥에 나무를 깔고 조명을 설치해 밤에도 경기를 했다. 관중을 1만7000명까지 받았다. 라디오 중계가 인기를 끈 시절이다. 당대의 스타 신동파는 아나운서 임택근의 멘트를 기억한다. 해가 기울어 조명탑의 불빛이 번지려는 그 시간.
“황혼이 짙어가는 이곳 장충단 육군체육관….”
육군체육관은 ‘관(館)’ 자가 무색하게 지붕이 없었다. ‘우천으로 인한 연기’나 ‘우천으로 인한 경기 중단’이 잦았다. 비가 내리면 나무 바닥에 덮개를 씌웠다. 여름에는 플로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신동파는 “플로어가 너무 뜨거워 작전 타임 때 농구화 바닥을 찬물에 적시곤 했다”고 회고했다. 눈이 내려 얼어붙는 겨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장충체육관은 농구의 메카다. 개장 이튿날 동남아여자농구대회가 열렸다. 또한 긴 세월 동안 우리 스포츠의 성지였다. 김기수가 1966년 6월 25일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김일은 이듬해 4월 29일 미국의 마크 루인을 이겨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헤비급 챔피언이 됐다. 서울올림픽 때는 유도 경기가 열렸다.
역사의 질곡도 고스란히 받아냈다. 박정희와 최규하,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었다. 문화행사의 중심 무대이기도 했다. 1966년 6월 12일 미국의 팝 스타 팻 분이 내한 공연을 했다. 그는 오후 7시에 시작된 ‘팻 분의 밤’에 우리 팬들의 귀에 익은 노래 열세 곡을 불렀다. 1989년 12월 9일과 1992년 12월 12일에는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체육관은 낡아갔다. 개관한 지 50년이 지나면서 비가 새는 등 노후화가 심각해졌다. 잠실체육관 등에 밀려 경기가 열리는 횟수도 줄었다. 서울시는 헐거나 다시 짓는 대신 개보수를 택했다. 2012년 5월 공사를 시작해 2015년 1월 17일 재개장했다. 지금은 체육관과 복합문화공간을 겸하고 있다. 장충체육관은 운이 좋았다.

그러나 장충체육관과 함께 우리 스포츠의 중심 무대였던 동대문운동장의 운명은 달랐다. 이곳은 경성운동장으로 시작해 오랫동안 ‘서울운동장’이었다. 2007년 12월 13일 새벽, 철거가 시작됐다. 경기장을 헌 자리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섰다. 물리적 공간이 사라지면 문화적 장소가 사라지고, 장소와 흔적이 사라지면 기억마저 흐려진다.(정윤수)
동대문운동장은 ‘일제잔재’다.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해 1925년 10월 15일에 개장했다. 바로 그곳에서 일제강점기 조선 청년들이 울분을 토해내고 갈닦은 기량을 떨쳤으니 우리 스포츠의 태반과 같은 곳이다. 손기정과 남승룡도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하러 가던 길에 잠시 들러 땀을 흘리며 심신을 가다듬었다.
서울시청 건물은 그나마 외양 일부 보존
운동장이 자리를 잡은 곳은 조선의 풍수철학이 살아 숨 쉬는 성동원두(城東原頭). 조선의 도성 한양의 ‘좌청룡’인 낙산의 기가 약하기에 동쪽 대문은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넉 자로 된 현판(흥인지문·興仁之門)을 걸었다. 또한 군사를 선발하고 조련하는 훈련원을 두어 젊은 기운을 흠향케 하였다. 운동장을 짓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

그러므로 동대문운동장 일대는 한 시대의 염원과 정성이 모인 역사의 현장이다. 동대문운동장의 최후는 우리 시대의 경솔함을 증명한다. 멀쩡한 곳을 밀고 거창한 무언가를 짓겠다는 사람들은 태반이 도둑 아니면 사기꾼이다. 또한 정치가나 사업가들은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서슴지 않으니 곧이곧대로 들으면 큰일 난다.
동대문운동장 신세가 될 뻔했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서울시청 건물을 보라. 서울시는 구구한 이유를 들어 새 청사를 지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중에는 시청 건물의 모양이 근본 본(本)자를 본뜬 것으로, 북악산이 큰 대(大)요 조선총독부가 날 일(日)자이니 합쳐서 ‘대일본’을 뜻하는 치욕적인 콘셉트를 숨겼다는 주장도 있었다.
터무니없는 주장임을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이라는 잡지의 1926년 10월호가 증명한다. 총독부 건축과 기사 사사 게이이치(笹慶一)는 ‘경성부청건축의 대요와 그 특징’이라는 기고문(14~17쪽)에서 “활모양(弓形)의 외곽에 작은 탑(小塔)을 얹은” 설계 개념을 설명한다. 경성부청은 서울시청의 옛 이름. 설계자는 이와이 나가사부로(岩井長三郎)다.
시청 건물은 도서관으로 쓰임을 바꾸었다. 외양의 일부나마 보존했으니 천운이다. 일제 잔재에 대한 역사·문화적 평가와 인식은 세대를 건너뛰는 숙제다. 답을 정하는 일은 여러 세대의 합의를 거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시청을 헐고 다시 짓자는 사람들이 정말 일제 잔재를 청산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긴가민가하지만.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에 태어난 소년은 초로의 산책가가 되어 오래된 도시의 동쪽 언저리를 소설가 구보씨처럼 배회한다. 거기에 다시는 빛나지 않을 조명탑이 선 채로 죽음을 맞은 시대의 상징처럼 처연히 섰다. 운명이 비껴갔다면 ‘서울 팀’ 프로야구 LG 트윈스가, 프로축구 FC서울이 그곳에서 홈 경기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진석 한국체육대 교수. 스포츠 기자로 30여 년간 경기장 안팎을 누볐으며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지냈다. 2023년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