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심연에 존재하는 ‘본질적 공포’에 푹 젖어든다

2024-07-25

김인숙 작품 ‘자작나무 숲’을 비롯

작가의 미스터리·호러 묶은 선집

오롯이 서스펜스를 음미해볼 기회

서늘함을 넘어 내면을 곱씹게 된다

물속의 입 |

김인숙 지음 |문학동네 |324쪽 |1만7000원

‘나’는 할머니의 죽음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아흔 살이 넘은 할머니는 ‘호더’(저장강박장애를 겪는 사람)였다. 할머니의 집에는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고 쥐와 벌레의 온갖 사체가 우글거렸다. 그러나 그 끔찍한 집은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 유일한 상속자였으니까.

엄마는 15세에 ‘나’를 낳았고, 18세이던 아빠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나’를 임신한 엄마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면서.

혼자 남은 엄마는 ‘나’를 담보로 할머니의 집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할머니의 집은 쓰레기가 가득했지만, 집값은 결코 쓰레깃값이 아니었다. 인생 전체를 걸고 기다릴 만한 액수였다. 그러나 엄마는 나이 오십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 엄마가 죽은 후, 부동산을 통해 할머니의 집값을 확인해본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엄마와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죽음을, 쓰레기 집의 상속을.

김인숙 작가의 단편소설 ‘자작나무 숲’은 화자인 손녀가 할머니의 시신을 유기하러 가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여기에 할머니가 ‘호더’였다는 설정이 뒤따르면서 소설은 할머니가 호더가 된 비밀, 화자가 할머니의 시신을 유기하게 된 연유를 추적해 나간다.

<물속의 집>은 ‘자작나무 숲’을 비롯해 김인숙 소설의 미스터리·호러 단편들을 묶은 선집이다. 문학동네는 그간 김인숙 작가의 서스펜스가 문학적 가치와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가교 역할로서만 평가받았다는 데 대한 아쉬움을 표하며, 오롯이 서스펜스를 음미하는 독서 체험을 선사하고자 이 선집을 엮었다고 밝혔다.

출판사의 의도대로 작품들은 미스터리와 환상, 착란적인 설정을 변주하면서 독자에게 몰입감을 선사한다. ‘자작나무 숲’에서는 할머니네 집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동네 아이들이 죽은 쥐, 바퀴벌레가 쏟아져나오자 혼비백산해 달아나듯, 독자도 쓰레기 더미 속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긴장감과 반전을 예감하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러면서도 작품들은 죽음, 상실, 시간의 불가역성, 인과로 설명되지 않는 불가해한 세계 등 독자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공포심을 건드린다. 그 공포심은 생의 비애와 맞닿아 있기에 작품들은 한 줄기 서늘함에 그치지 않고 날카로운 잔상을 남긴다.

‘자작나무 숲’의 할머니는 “하나도 버릴 게 없어서”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다. 한 번은 이런저런 사연들을 다루는 방송에서 할머니의 쓰레기 집을 소개하고는 깨끗이 털어갔다. 할머니는 텅 빈 집을 거대한 상실감과 비통함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온갖 쓰레기들로 집을 채웠다.

할머니는 어쩌다 호더가 된 것일까. 할머니가 호더가 된 것은 아빠의 죽음 때문일까. 독자는 몇 가지 예상을 하며 페이지를 넘기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독자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깜짝 놀랄 반전으로 심리적 충격과 여운을 안긴다. 소설에서는 자작나무를 “하얀 껍질이 종이처럼 벗어지는 나무” “한 껍질을 벗기면 또 살아서 다시 하얘지는 나무”로 표현한다. 소설은 벗겨도 벗겨도 다시 하얘지는 나무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상실의 기억, 혹은 그 기억을 놓지 못하는 서글픈 애도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책은 이밖에 섬찟한 비밀을 담은 ‘빈집’ ‘소송’ 등의 단편과 형사 안찬기가 섬 ‘하인도’와 영천에 있는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미스터리한 사건을 추적하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물속의 입’ ‘호텔 캘리포니아’ 등 연작 형식의 단편소설 9편을 담았다.

한 소설가의 죽음에서 시작하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형사 안찬기가 소설가의 죽음과 소설가의 딸의 익사 사건을 추적하면서 전개된다. 섬에 고립된 10명의 등장인물이 각자의 죄로 살해당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동명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젊은 여성의 익사 사건과 거기에 뒤얽힌 ‘죄’에 대해 다룬다. 사채 독촉에 시달리던 딸은 오동수라는 조폭에 쫓기다 저수지에 빠져 죽는다. 그러나 한편에는 쫓기던 딸을 외면했던, 그리고 각자의 이유로 증언을 거부했던 시인, 음악가, 연출가 등 소설가의 동료들이 있었다. 한편의 부조리한 연극처럼 읽히는 이 작품은 미스터리한 사건과 여기에 얽혀 있는 인간의 비겁함, 위선, 사법적 단죄와 예술의 의미에 대해서 곱씹게 한다.

9편의 연작소설의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노래는 ‘호텔 캘리포니아’다. ‘언제든 원할 때 체크아웃할 수 있지만 절대로 떠날 수는 없는’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각 작품은 독자들에게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삶의 본질적 공포를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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