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자취를 했던 곳은 상가 건물의 꼭대기 층으로, 매일 지상철 소리가 들렸다. 그 집에 살 때 처음으로 휴학계를 냈다. 아빠가 집을 떠나고, 엄마는 병원에 입원하고, 나는 등록금을 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직서를 내듯 교수님께 휴학을 선언했고 면담실을 나왔다. 학비를 벌어서 다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형마트에 입점해 있는 일본 생활용품 매장에 취직했다.
나는 그 브랜드를 좋아했다. 비싸서 살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시내에 나가면 줄곧 그 브랜드의 매장을 둘러보곤 했다.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 정갈한 디스플레이, 아늑한 분위기까지. 가능하다면 매장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직원이 되고 알게 된 것은 매장 직원은 그 브랜드의 옷을 입고 일해야만 한다는 것, 그 옷은 본인이 직접 구입해야 한다는 것, 구매 시 직원 할인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통장에 남은 7만원에서 2만원을 뽑아 제일 싼 티셔츠를 샀다. 다행히 바지는 언젠가 샀던 그 브랜드의 여름 바지가 있었기에 망정이었다. 영하 십몇도를 밑도는 겨울에 티셔츠와 여름 바지는 필요 이상으로 산뜻했지만 실내에서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나는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했고 매니저로부터 눈초리를 받았다.
봉급은 포괄임금 제도와 수습 직원이라는 명목 아래 최저시급보다 낮았다. 식대는 당연하다는 듯이 불포함이었고, 점심시간이 되면 직원들은 근처 역전에서 비싸고 부실한 1만원짜리 정식이나 저렴한 데리버거 같은 걸 먹었다. 그리고 모여 앉아서 요즘 뜨는 배우나 유행어 같은 시답잖은 화제들을 입에 올렸다. 모두가 혈기 왕성한 청년들로, 그 시시콜콜한 대화들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묘한 기류들이 오갔다. 나는 그 모든 것에서 살짝 비켜난 채 모서리에 앉아 묵묵히 밥을 먹었다.
직원 중에서 나는 유일하게 도시락을 싸 오는 사람이었다. 나는 일하지 않는 모든 시간을 밑반찬을 만들며 보냈다. 교육열이 높은 중산층 엄마가 수능반 아이에게 보내는 도시락처럼 정성을 들였다. 덕분에 안 그래도 적은 봉급에 저금할 돈은 거의 남지 않았고, 그럼에도 어쩐지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등록금을 모아야 하는 내가 주제에 안 맞는 도시락을 싸는 것과 구두쇠인 일본인 사장이 우리의 임금을 낮게 주는 것이 어딘가 비슷한 방식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시금치나물을 씹었다. 내 도시락은 어떤 식당에서 파는 것보다 푸짐하고 영양가 있었고, 그걸로 기분은 좀 나아졌다. 밥을 다 먹으면 역사를 걸어 다녔다.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의 높은 천장, 짐을 들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도착하고 출발하는 사람들 사이를 부유했다.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그곳의 매니저에게 미움을 샀는데, 그녀는 줄곧 내 인사를 무시했고 손님이 없을 때면 나를 제외한 모든 직원을 데리고 휴식시간을 다녀오곤 했다. 걸레를 담당하는 것도 나였는데, 시간이 되면 나는 매장 곳곳에 있는 걸레를 수거해서 가득 찬 들통을 지고 대형마트의 직원 구역으로 향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어도 직원 화장실에는 온수가 나오는 법이 없었고, 나는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한 번씩 손을 불어가며 걸레를 빨았다.
그때 내 관심사는 유치한 괴롭힘과는 다른 쪽에 있었는데, 어느 날 매장에서 일하는 나를 회사 사장이 우연히 발견하고 그 참한 모습에 반해 나를 구출하는 상상에 몰두했다. 청초하고 근면하면서도 숨길 수 없는 우아함이 뿜어져 나오는 언뜻 범상치 않은 여자 직원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걸레를 빨면서 거울을 보며 귀한 집 규슈가 될 만한 상인지 살폈다. 일본어로 건네는 첫마디를 뭘로 할까 고민했다. ‘교노 오텐키와 이데스네’(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같은 말을 생각했지만 우스운 일이었다.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지금이 몇시인지조차 그곳에선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