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미 수필가
창 너머 나무들이 주체하지 못하는 몸짓인 걸 보면 오름의 정경이 짐작이 간다. 바람의 세기가 가을을 주관하기에 마음마저 흔들려도 좋은 가을이다. 자연과의 경계가 썸 타는 시간도 없이 허물어진다. 이울기 전에 가을의 찬란함을 흡입하고 삶을 충족하자는 마음에 오름의 억새가 연일 나부낀다. 더는 지체하지 않고 출발한다.
평일을 선택한 이유대로 주차 자리가 비어 있다. 자동차와 사람들의 소음으로 오름을 느낄 새도 없이 하늘마저 칙칙했었던 날이 있어 선별한 오늘이 길 일이려나. 바람이 심상치는 않다.
폭이 넓은 계단이 무수히 밟혀도 모로 눕는 기색도 없이 기꺼이 제 몸을 내주어 발걸음 편히 디딜 수 있다.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려 걸음을 멈추고 오르던 길을 돌아 보다 계단 옆 풀숲에 피어있는 꽃향유를 보았다. 어쩌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왜소한 체구에 음울한 보라색 꽃이 수심이 가득하다. 예전의 꽃향유는 화사한 보랏빛으로 오름 군데군데에 화룡점정을 찍어 주었는데 꽃도 코로나를 앓았을까.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바람에 대항할 힘은 고사하고 바람을 피할 벽조차 허락지 않은 무방비 상태다. 풀잎들이 자유의지는 박탈당하고 일제히 한 방향으로 휘어진다. 바람이 순해질 때까지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듯 풀잎들은 일사불란하다. 풀잎 가닥 하나도 방향을 틀지 않는다. 사람의 골격도 휘어질 지경이어서 쪼그려 앉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정상에 도달하겠다는 의지는 접을 수 없어 바람을 거슬러 몸을 반은 숙인 채로 걸음을 뗀다. 근육질로 다져진 몸도 아닌, 허약체질이 버티기엔 턱도 없어 사방을 휘리릭 둘러보고 내려온다. 오름에서 추락할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가 엄습하는 순간이다. 바람에 순응하는 풀잎들이 옳았다고 일별을 주는데 풀잎 사이로 억새들이 끼어있는 걸 발견했다. 바람이 시야마저도 혼란스럽게 했다지만, 억새의 등줄기가 빈한하여 풀잎과 분별이 되지 않았다. 어인 일로 오름의 주빈이어야만 할 억새가 풀잎의 엑스트라쯤으로 전락하여 버렸을까.
바람이 불어 대도 억새를 헤집고 한 컷을 남기는 이들이 있었다고, 옛말을 한다 해도 못 믿을 일이라고 아예 오름이 함구하고 있다. 오름 초입에서부터 의아했다. 지금쯤이면 억새의 들썩임으로 충만할 오름의 품새가 와락 안겨 와 한달음에 정상으로 돌진할 태세일진대. 억새 사위가 드문드문이더니, 홀로인 듯 빈 오름 자락을 지나면서도 아직 심각 수준은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오름 입구에서 중요한 시간을 헌납하고 왁자하게 떠나왔을 관광객들이 하산하는 길에 따라비를 등지고 중얼거리는 말, ‘오름의 여왕 ….’ 한 대목만 귀에 닿았다. 무심히 걸어왔다. 오름을 내려오다 의자에 앉아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는데 정상으로 향하던 한 여인이 나직이 ‘은빛 물결….’ 그리곤 더는 듣지 못했다. 인제 나머지 문장을 추측하면 ‘아니다’라고 실망의 어조였다고 단언한다.
그해 11월의 그믐쯤에 로맨스그레이가 아름다운 황혼의 억새를 영접하던 때가 있었다. 우묵한 굼부리에 백발이 성성한 억새 무리가 박제되어 끄떡없이 서 있었던 날이 인장처럼 새겨졌다. 스러져도 아름다운 존재였다.
따라비는 오름의 여왕이 아니던가. 따라비는 찬란해야만 하거늘, 다시 오겠다는 언약을 하고 사뿐히 돌아섰던 예년과 다르게 우울하다. 초췌한 오름이 안쓰러워 절실한 것은 쉼이 필요하다. 안식년을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