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은 누구에게 더 잔인한가

2025-07-14

흔히 ‘살인적’ 더위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 말이 그저 비유가 아니라 진짜 사실이라면, 더위로 인해 사람들이 숨지는 일이 빈발한다면, 쉽게 입에 담을 수 없게 된다.

폭염 속에서도 건물은 올라가고, 물건은 운송되며, 마트 영업과 배달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는 것은 곳곳에서 사람이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다들 집에서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고 쇼핑도, 금융도, 정치도, 이른바 사회적 합의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공사장에서, 마트에서, 밭에서, 도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폭염으로 쓰러졌다. 맨홀 아래에서 측량 작업을 하다가, 공공근로로 쓰레기를 줍다가, 마트에서 카트를 정리하다가, 공사장에서 아파트를 짓다가 목숨을 잃었다.

문제는 폭염만 탓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혹독함을 막아주면서 사람이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며 일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다. 이는 문명을 발달시키고 제도를 만드는 중요한 이유이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만드는 시대와 21세기 고층 아파트를 올리는 시대는 달라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2025년 지금, 폭염으로 노동자들이 쓰러지고 죽어 나가는 것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의미한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23세 베트남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을 보면, 한국인 노동자들은 협약에 따라 오후 1시에 더위로 인해 작업장을 나설 수 있었지만 외국인 노동자인 그가 속한 팀은 오후 4시까지 일하게 했다고 한다.

폭염 속 노동자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다. 기후위기는 모두를 무차별로 습격하지만, 이를 막기 위한 우리 사회의 보호막은 충분히 넓지도 두껍지도 못하다. 게다가 여기에 차별이 얹어지니 보호막은 더 좁고, 결과는 더욱 참혹해진다. 우리 사회는 보편적 복지와 사회권을 말하지만 그 기초인 생명권조차 넓게 보호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해고노동자의 생명에 무심한 것은 의외도 아니다. 구미의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노동자 박정혜씨는 뜨겁게 달궈진 공장 옥상에서 550일을 넘기며 두 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다.

작업 현장은 더 뜨거워졌는데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사회의 발걸음은 느리고, 노동에 대한 보상은 별로 나아지고 있지 않다. 여럿이 목숨을 잃은 후에야 체감온도 33도 이상 작업 현장에서 2시간 일하면 20분 쉴 수 있도록 하는 산업안전보건기준 규칙이 얼마 전에 통과됐다. 다른 한편 2026년 최저임금은 지금의 1만30원보다 290원 오른 1만320원으로 결정됐다. 사회적 합의에 의한 인상임을 강조하지만, 오른 물가를 생각하면 이전 정부들에서보다 매우 낮은 2.9%라는 인상률도 아쉬운데, 최저임금을 특고·플랫폼 노동자에게로 넓히자는 시도가 무산된 것은 더욱 주목할 점이다. 바닥이 없이, 성과만으로 임금이 결정되는 노동자들은 폭염·폭우에도 제대로 쉴 수 없다. 회사는 이들에게 적정한 휴식보다는 건수 채우기를 권한다. 예컨대 배달의민족은 라이더에게 주어지는 기본 배달료는 낮춰놓고, 폭염기 배달 건수를 늘리기 위한 금전적 유인책을 도입했다.

이 정도면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다시 고민해야 할 것 같다. 폭염에 우리 사회는 이미 잔인한 바닥을 드러냈는데 당장 계속 더 더운 여름날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막막하다. 나는 유럽 극우정당의 기후위기 대책이 고작 에어컨 공급 확대라는 것을 한심해했지만 이제 그럴 자격이 있나 싶다. 노동권 보호와 분배 정의 없이 기후 정의는 홀로 갈 수 없는데 우리는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에도 다가가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폭염의 시대는 우리에게 제대로 된 산업안전장치는 물론 소득과 고용 보장, 차별 철폐를 서두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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