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는 왜 동물의 몸을 고문서에 비유할까[BOOK]

2025-05-30

불멸의 유전자

리저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을유문화사

영화 ‘장미의 이름’(1986)은 “움베르토 에코 소설의 팰림프세스트”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팰림프세스트(palimpsest)는 먼저 쓴 글 위에 나중에 다른 글을 겹쳐 쓴 고문서를 가리킨다. 중국에서 종이가 전파되기 전인 중세의 서양에선 주로 양피지에 글을 썼다. 하지만 워낙 값이 비싸, 더는 필요 없어진 글을 지우고 문서를 ‘재활용’하는 경우가 흔했다.

영화 첫머리의 자막은 '에코의 원작 소설을 각색했다’는 얘기를 문학적으로 돌려 말한 것이다. 영화가 소설 속 여러 층위의 역사·문화적 사유를 재해석한다는 점, 중세 수도원 도서관에 숨겨진 고문서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줄거리,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이 여러 사람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겹쳐 찍힌 눈밭을 바라보며 팰림프세스트에 비유하는 장면 등과도 겹친다.

재미있는 건, 먼저 쓴 글을 완벽히 지우기 힘들었기 때문에 팰림프세스트에 원문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잘만 해독만 하면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혀낼 수 있는 것이다.

진화생물학계의 세계적 석학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 저술가’로 꼽히는 리처드 도킨스는 신간 『불멸의 유전자』에서 동물의 몸과 유전체를 팰림프세스트라고 부른다. “한 동물이 지닌 생존기구의 모든 측면은 조상들의 자연선택을 거쳐 유전자를 통해 물려받은 것”이기에, 결국 그들은 조상이 살던 자연환경에 대한 정보를 “암호”로 숨기고 있는 한 권의 책, 곧 “사자(死者)의 유전서”라는 것이다. 신간의 영어 원제(The Genetic Book of the Dead)는 이를 가리킨다.

저자는 이런 자신의 주장을 자연계의 다양한 실사례를 통해 풀어낸다. 가장 직관적인 예는 뛰어난 '위장술'을 가진 동물들이다. 피부 색깔과 무늬가 모래·돌과 닮은 사막뿔도마뱀, 색깔뿐 아니라 형태까지 나뭇가지를 똑 닮은 자벌레…. 이들은 각자의 조상이 모래·돌과 나뭇가지가 많은 환경에서 살았음을 알려준다. 조상들이 포식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 주변 환경과 닮은 모습으로 진화해 온 결과가 그들의 현재 모습이기 때문이다.

단지 과거뿐일까. 도킨스는 진화 팰림프세스트가 과거의 기록물인 동시에 “미래 예측서”라고 말한다. 동물들의 진화는 “미래가 자신들의 조상들이 성공적으로 대처했던 과거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쪽에 판돈을 건” 결과라는 것이다.

이렇듯 진화를 ‘과거를 근거로 미래를 예측하는 과정’으로, 그 주체를 ‘불멸의 유전자’로 보는 것은 도킨스가 이전부터 일관되게 견지해온 관점이다. 그는 대표작이자 영국왕립학회 선정 ‘역사상 가장 영감을 주는 과학책’인 『이기적인 유전자』(1976)에서 유전자를 진화의 단위와 주체로 조명했다. 후속작 『확장된 표현형』(1982)에선 유전자의 영향력을 개체 외부, 즉 환경과 타생물로까지 확장했다.

새 책에서도 두 전작의 설명을 간추리며 그간 일부 학자들이 제기했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을 편다. 이번 책을 『이기적인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을 잇는 ‘종합본’ 혹은 '완결편'으로 볼 수 있는 이유다.

내용이 깊고 방대하지만 딱딱한 이론서는 아니다. 원서의 부제인 '다윈주의적 몽상(A Darwinian Reverie)'에서 상상할 수 있듯 '과학 에세이'에 가깝다.

글의 이해를 돕는 다양한 동물 사진과 일러스트를 풍성히 넣은 점, 독서를 방해할 수 있는 주석을 각주가 아니라 미주로 처리하고 본문에선 주 번호까지 삭제한 점, 주석을 ‘이왕 나왔으니 말인데’ 하는 여담 식으로 써서 그 자체로 읽는 재미를 준 점 등도 그가 왜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과학 저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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